한국전쟁 후 공업화가 경제에 미친 영향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한국전쟁의 발발

2. 한국전쟁의 의미

3. 한국전쟁이 발생하기 전 남북한 경제

4. 전쟁으로 인한 산업 및 기관의 피해 상황

5. 한국전쟁이후 경제재건의 원동력

6. 전후 경제 재건의 전개

7. 한국 전쟁 10년 후 경제개발의 전개

8. 결론 : 한국전쟁 후 공업화가 경제에 미친 영향

본문내용

회의 균형발전 등에 기본목표를 두었다. 지금은 6차례의 5개년계획을 끝내고, 92년 제7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었다
8. 결론 : 한국전쟁 후 공업화가 경제에 미친 영향
1950년대 한국경제는 국민총생산을 지표로 보면 분명히 규모의 확대와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그리고 성장을 받쳐 온 산업은 산업구조변화의 동향에서 불 때 제2차산업, 그 중에서도 제조업이 중추적 역학을 하고 있다. 1950년대 전반은 소비재공업부문이 주도했고 불황의 심화와 외국원조의 절감이 시작된 1950년대 후반의 공업화는 생산재공업부문 그 중에서도 중간재공업부문에 의해서 주도되었음이 분명하다. 이후의 고찰에서 1950년대의 한국경제는 공업화에 의해서 성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공업화를 규정한 자본형성은 어떻게, 무엇에 의해 이루어졌는가를 알아보면 첫째로 막대한 외국원조에 의해서 그리고 둘째는 정부의 재정투융자정책에 의해서 셋째는 금융기관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첫째, 민간저축이 동원되지 못했으며 될 수도 없었기에 이것이 자본형성에 기여하지 못했던 점과 둘째, 재정투융자 그리고 금융기관의 경우에도 그 자금원은 주로 외국원조인 대충자금, 1957년까지는 국채류의 발행에 의존하고 있었던 점이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1950년대의 공업화는 자금 면에서 전적으로 외국원조에 뒷받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비록 원조가 있어도 자국내에서 이것을 기반으로 공업화를 전개할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의 존재여부 즉 ‘내재적 힘’이 국내에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원조만으로 공업화의 역량이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재기한 공업화로의 ‘내재적 힘’이란 정부의 역량이나 정책차원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를 역사적사회적으로 형성시켜온 주체적객체적 조건과 능력을 포함한 사회가 갖고 있는 공업화로의 총체적 전개력을 말한다. 1950년대 한국경제는 공업화 추진에 있어 해방 후의 ‘내재적 힘’에 의한 자생적인 전개를 의도하는 단계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하면서 정부주도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자생적인 공업화의 태동이 점차로 무너지는 단계였다고 할 수 있으나 그 태동을 완전히 소진시킬 수 없었다.
앞에서 검토된 것처럼 1950년대 한국경제의 성장은 제2차산업 그 중에서도 제조업의 확대를 중심으로 한 공업화에 의해서 달성되었다. 이러한 공업화를 자본투자 측면에서 보증한 것은 막대한 양의 외국원조와 정부의 재정투융자정책이었다. 그러나 외국원조나 정부의 지원으로 특혜를 누린 것은 주로 대기업들이었다. 이와 같은 1950년대의 한국의 공업화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 대기업의 성장이 이 시기의 한국경제 분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1950년대 한국경제의 공업화 과정을 분석하는 경우에는 항상 특혜 속의 대기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한국전쟁 후의 경제재건 과정을 보면 공업부문의 복구는 기존 기업을 중심으로 개시되었는데 이 시기의 기업은 대부분 중소기업이다. 1953년 기업체수의 구성비율은 대기업이 4.1%인데 비해 중소기업은 95.9%였다. 이후 외국원조와 정부지원으로 소비재 공업을 중심으로 공업건설이 진행되어 생산이 일정궤도에 오르면서 국내시장을 독점하는 기업이 출현하는데 이것이 소위 삼백공업과 고무공업이었다.
대기업은 원론적으로 그들 생산체제의 근대성으로 인하여 가격체제에서부터 유통시장구조까지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 경제원리의 관철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경제원리의 관철을 허용하는 조건이나 여기에 적응할 수 있는 계층이 1950년대 중반의 급속한 공업화 정체기에 섬유공업이 타개책으로 보여준 도시소비자 지향제품으로서의 생산 품목 전환은 이와 같은 상황의 한 면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대중의 시장은 재래시장, 상설시장 및 정기시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근대적인 가격체계와는 다른 가격결정원리를 갖는 이질적인 경제원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장에서 소매업자들은 중소기업과 긴밀하게 결합된 도매업자로부터 제품을 매입하든지 또한 영세한 경우에는 도소매업을 겸하여 직접 중소기업에서 매입하는 방법으로 판매한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보다 광범위하게 일반대중의 경제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인 것이다.
중소기업의 주문생산 비율이 높다는 것은 이와 같은 형태로 국내시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1950년대의 한국경제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인 도시형의 유통체계를 갖은 시장권과 도매업과 결합된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전근대적 농촌형의 유통체계를 갖는 시장이라고 하는 2중구조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대기업의 생산성에 압도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은 생산의 지역적 성격과도 서로 맞아 국내시장에 존립기반을 계속 확보해 나갈 수가 있었으며 이에 따라 대기업의 계열화하청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1950년대의 공업화과정을 보면 1957~1958년경의 국내 불황의 심화와 외국원조의 삭감은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국외시장지향과 수출지향의 업종기업의 분화가 형성되었으며 수출지향의 업종기업은 설비의 근대화를 실행해 간 경향이 지적될 수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주요한 대기업은 수출지향 생산에, 중소기업은 그 중에서도 특히 영세한 것은 국내시장 지향의 생산으로 기울어져간 경향을 관찰할 수 있다.
끝으로 공업의 내부연관 형성에 관해서 살펴보면 지금까지 1950년대 공업의 전개에서 공업의 내부연관이 전혀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 강조되었으나 이의 태동조차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섬유공업은 직포, 봉제 등의 기계부문 발전을 촉진했고, 자동차공업은 부품공업과 고무타이어부문의 성장이 완성자동차 공업의 발전을 유인하면서 내부연관을 형성시켜 가고 있다. 그러나 이 부문에서도 금속가공 부문의 지연으로 특수한 중요부품을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공업화에서 소비재 경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내부연관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1950년대의 공업화가 한국 전쟁 후 경제재건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04.11.20
  • 저작시기2004.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431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