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답사를 열면서
◆답사일정
◆보광사
◆자운서원(紫雲書院)
◆반구정(伴鷗亭)
◆용미리 석불입상
◆답사일정
◆보광사
◆자운서원(紫雲書院)
◆반구정(伴鷗亭)
◆용미리 석불입상
본문내용
는 계속 되었다. 이번 답사는 엠티 성격이 강한 답사여서 그런지 예전의 그러한 빡빡한 일정은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친구와 보광사를 지나쳐 위의 암자로 등반을 다녀왔다. 역시 산사의 아침은 고요, 적막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볼수있게 해주는 것 같다.
각설하고, 용미리 석불입상으로 이동했다. 용미리 석불입상을 보면 예전의 대구 팔공산답사가 눈에 선하다. 그곳의 갓바위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다. 그리고 작년 안성 소답사때도 많은 미륵(기솔리 쌍미륵, 궁예미륵, 태평미륵)등이 있었는데 그것과 비슷할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아니나다를까 버스에서 내리자 우리를 압도하는 웅장한 모습과 한편 친근한 미소를 보이는 쌍미륵이 있었다.
용미리 이름의 연원을 밝히면 광주 산맥의 곁가지를 타고 뻗어온 용들이 한양을 만들고 그 꼬리가 머물러 있는 고장을 광탄면 용미리(龍尾里)라 했다고 한다. 그런 그곳에 세상을 편안케 하는 불상이 없을 리 없다. 예전 마을 이름도 미륵뎅 이였다. 왼쪽 석불은 둥근 모자를 썼고, 오른쪽 석불은 네모난 모자를 썼는데, 그 크기와 위용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눅들게 하였다. 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것을 조각한 석공은 분명 수십 년을 자기최면과 불심으로 이 석불을 만들었으리라. 우리의 옛 민초들은 큰 바위에 산신이 산다고 믿어 바위를 숭상하는 신앙을 오래 전부터 간직해 왔다. 그러다가 외래종교인 불교가 들어오자 이번엔 그 바위에 부처님의 얼굴을 새겨 놓고 소원을 빌곤 했다. 이렇게 바위에 부처님의 형상을 돋을새김이나 선새김으로 조각해놓은 것을 마애불이라고 하는데 잘 알려진 것으로 서산 마애삼존불, 안동 제비원 석불, 선운사 마애불 등이 있다. 보통 수직으로 경사진 자연암에 조각하는 것이므로 작업하기가 일반 석불보다 훨씬 힘들고 위험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더구나 고려 초에 한창 유행한 거대마애불은 불상의 크기가 대개 10m를 훨씬 넘는 거대불이어서 엄청난 공력이 들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석불 앞에 가보니 쌍미륵 으로부터 복, 구원을 원하는 사람들이 향을 피워놓고 절을 하고 계셨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민중불교구나. 민중과 더불어 숨쉬는 불교이다’. 라고 생각하니 더욱 용미리 석불이 듬직하게 느껴졌다. 이 석불 건너편에는 용미리 시립묘지가 있다는데 아마 죽은 자에게도 따뜻한 미소를 보내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답사를 마무리 했다.
각설하고, 용미리 석불입상으로 이동했다. 용미리 석불입상을 보면 예전의 대구 팔공산답사가 눈에 선하다. 그곳의 갓바위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다. 그리고 작년 안성 소답사때도 많은 미륵(기솔리 쌍미륵, 궁예미륵, 태평미륵)등이 있었는데 그것과 비슷할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아니나다를까 버스에서 내리자 우리를 압도하는 웅장한 모습과 한편 친근한 미소를 보이는 쌍미륵이 있었다.
용미리 이름의 연원을 밝히면 광주 산맥의 곁가지를 타고 뻗어온 용들이 한양을 만들고 그 꼬리가 머물러 있는 고장을 광탄면 용미리(龍尾里)라 했다고 한다. 그런 그곳에 세상을 편안케 하는 불상이 없을 리 없다. 예전 마을 이름도 미륵뎅 이였다. 왼쪽 석불은 둥근 모자를 썼고, 오른쪽 석불은 네모난 모자를 썼는데, 그 크기와 위용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눅들게 하였다. 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것을 조각한 석공은 분명 수십 년을 자기최면과 불심으로 이 석불을 만들었으리라. 우리의 옛 민초들은 큰 바위에 산신이 산다고 믿어 바위를 숭상하는 신앙을 오래 전부터 간직해 왔다. 그러다가 외래종교인 불교가 들어오자 이번엔 그 바위에 부처님의 얼굴을 새겨 놓고 소원을 빌곤 했다. 이렇게 바위에 부처님의 형상을 돋을새김이나 선새김으로 조각해놓은 것을 마애불이라고 하는데 잘 알려진 것으로 서산 마애삼존불, 안동 제비원 석불, 선운사 마애불 등이 있다. 보통 수직으로 경사진 자연암에 조각하는 것이므로 작업하기가 일반 석불보다 훨씬 힘들고 위험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더구나 고려 초에 한창 유행한 거대마애불은 불상의 크기가 대개 10m를 훨씬 넘는 거대불이어서 엄청난 공력이 들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석불 앞에 가보니 쌍미륵 으로부터 복, 구원을 원하는 사람들이 향을 피워놓고 절을 하고 계셨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민중불교구나. 민중과 더불어 숨쉬는 불교이다’. 라고 생각하니 더욱 용미리 석불이 듬직하게 느껴졌다. 이 석불 건너편에는 용미리 시립묘지가 있다는데 아마 죽은 자에게도 따뜻한 미소를 보내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답사를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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