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보급물자가 승패를 좌우한 사례(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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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쟁에서 보급물자가 승패를 좌우한 사례(2차 세계대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유럽전역과 보급문제

1. 계획의 함정

2. 노르망디에서 센 강까지

3. '넓은 정면(broad front)'이냐 '예리한 돌파(knifelike thrust)'이냐?

4. 결 론

본문내용

향해 북으로 이어진 도로망보다 훨씬 양호하였다.
일상의 소비물자 공급외에 벨기에에 전방비축기지을 설치하려 했으나 수송능력이 부족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루르 진격은 수백 마일 후방의 주 보급기지에서 직접지원을 받아야 할 상황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요청한 보급물자가 전선에 도착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우려도 있었으나, 당시의 하루 650톤이라는 수송량은 매우 풍족한 양이었으며, 또한 프랑스와 벨기에에 있는 연합군의 병참선(특히 철도수송 시설들)은 급속히 개선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병참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작전을 한다 하더라도 그 위험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독일 공군이 이 병참선을 방해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루르 진격은 실현되지 않았다. 연합군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진격하면서 이미 두 번이나 보급상의 문제보다 전략상의 요구를 앞세워 진격했기 때문에, 여기서 루르 진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병참선을 극한으로까지 연장시키는 위험을 초래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바이외에서 도르트문트까지의 거리가 패튼이 주파한 셰르부르에서 메츠까지의 거리보다 길지 않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연합군은 실제로는 450마일 이상의 거리에서 전방부대를 보급지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문제가 있다면 방향이 틀렸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것과는 반대로 루르 진격계획이 수락되었다 하더라도 미군에서 영국군으로 수송부대를 이동시킬 필요가 없었으며, 따라서 복잡한 결과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문제는 미군 상호간에 차량을 이관하는 데 있었다. 벨기에에 진주한 3명의 연합군 지휘관들(크레라, 뎀프시, 하지스) 중에서 몽고메리의 계획에 가장 방해가 되었던 것은, 하지스의 보급상의 문제점이었다. 패튼이 정지했다면, 그에 따른 여분의 수송부대는 하지스의 제 1 군으로 전속되었을 것이다. 제 3 군의 정지를 거부함으로써 아이젠하워는 앤트워프를 점령하지 않고는 독일진격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그의 의견을 실현시켰다. 그리하여 11월말 앤트워프 항이 겨우 점령되고 나서야 하지스를 위한 보급지원거리는 400마일에서 70마일로 줄었던 것이다. 영국군은 그때까지 센 강과 영국해협의 여러 항구로부터 충분히 보급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앤트워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젠하워가 무게중심이 어디인지를 파악하고 우선 순위를 정하는 데 실패한 책임이 있다고 따진다면, 그것은 아이젠하워가 초인적인 통찰력을 지닐 것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된다. 연합군의 기본전략에 있어서 계획의 전환이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을 무렵 패튼은 전속력으로 진군하고 있었으며, 몽고메리는 진군해야 했던 거리가 훨씬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센 강을 향해 아주 느린 진격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상상력을 확대하지 않는 한, 항상 지나치게 신중하였던 이 지휘관이 그후 2주일 동안에 갑자기 자기의 능력을 초월하여 독일국경까지 200마일을 전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또한 몽고메리가 당초에는 패튼이 정지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패튼이 밀집대형을 구성하여 그의 공격의 측면을 보호해주길 원했으며 이를 위해 패튼의 공격목표를 동쪽 로렌에서 동북방의 벨기에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몽고메리 자신도 인정하듯이, 슐리펜 계획을 역방향으로 수행하고 있던 40개 사단들이 보급적으로 지원될 수 없다는 것을 그가 깨달았을 무렵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었다.
몽고메리는 처음에는 베를린 진군, 그리고 다음에는 독일 심장부를 향한 "예리한 돌파(knifelike thrust)"를 한다는 등 애매한 말을 함으로써 그의 계획이 수락되기를 더욱 더 어렵게 만들었다. 루르에 대한 18개 사단에 의한 공격은 아마 성공했을 것이다고 믿을만한 이유는 충분하지만 그렇게 적은 병력으로 독일의 수도까지 점령한다는 것은 예외적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리한 돌파"에 관해 말하자면, 단지 130마일 정도의 거리에서 수행되었다면 그것은 성공했을지도 모르지만, 400마일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목표를 찾아 더욱이 가장 가깝다는 기지마저도 다시 300마일 후방에 둔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은 확실히 위험하고 심지어는 무모한 일이었다. 또 그러한 공격이 비록 18개 사단 규모라 하더라도, 보급적인 측면에서는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몽고메리 참모진은 불과 12개 사단에 의한 공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보급은 1일 1개 사단당 4백 톤으로 줄일 수 있었으나 이 양마저도 제 21 집단군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가 말했던 것처럼 그러한 행동은 파멸만을 초래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몽고메리의 제안이 아이젠하워의 전략에 대해 진정한 대안을 제시했느냐는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대답해야만 할 것이다. 계산상으로는 루르의 진격에 필요한 수단은 이론적으로는 확보가 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 비록 전략적인 전개가 예상대로 발전되어 갔다 하더라도, 병참조직들이 충분한 속도로 적응하고 혹은 필요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오버로드작전을 위한 보급계획에서 시종일관했던 특징인 과도한 보수성과 소극성을 감안할 때 병참조직들이 그러한 적응력과 결단력을 지니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을 이유는 충분하다. 심지어 센 강으로부터의 진격이 수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병참지원이 실행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신중한 병참담당자들이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독일국경 돌파작전을 자진하여 지원하겠다고 제의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유럽원정군 최고사령부의 병참전문가들은 결코 영웅적 능력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수많은 작전들이 보급지원의 결여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보아온 우리들로서는, 비록 실전상황에는 뒤쳐지기는 하였어도 최종적으로는 이의없는 승리를 거둔 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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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5.04.02
  • 저작시기2005.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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