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원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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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반도지라 부르면서부터 지금껏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이다.
더욱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은 반도지의 배치가 북쪽 함경도 쪽을 남쪽에 놓고 남쪽 경상·전라도 지역이 북쪽에 오도록 거꾸로 배치함으로서 만주 일대를 누볐던 고구려인의 기상을 누르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즉 한반도 땅을 거꾸로 놓음으로서 철저하게 우리를 지배하고자 하였던 일본 제국주의의 속셈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어 우리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든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원은 창덕궁의 후원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러나 비원은 단지 후원이라는 기능만을 담당하던 휴식을 위한 공간만은 아니었다. 휴식 공간으로서 수양지로서 또는 학업의 수련장으로서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 낸 가장 규모가 크면서도 가장 잘 정돈된 정원인 것이다.
특히 우리 나라 조원문화(造苑文化)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후원으로서의 비원은 그 조영 원리에 있어서 자연과의 조화로움을 적절하게 유도해 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이제 과거 왕과 왕실만을 위한 금원이 아니라 전통적 조원술을 간직한 최고의 자연 공간으로서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 올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비원은 창덕궁의 후원으로 면적 약 10만 3천여 평에 이르는 왕실의 연회와 휴식공간이자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으며 사색을 할 수 있는 장소로 조영된 정원유적이다. 1405년에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이듬해 정자인 해온정(解瑥亭)을 짓고 그 앞에 못을 파면서 시작된 비원의 조영은 1921년의 선원전 건립에 이르기까지 계속 새로운 정자를 짓기도 하고 샘을 파는 등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후원, 북원, 금원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비원'이란 명칭은 대한제국기에 처음 나타난다. 비원이 가장 화려했던 때는 광해군 시기로 임진왜란으로 피폐된것을 복구하면서 수많은 정자를 짓고 기이한 꽃과 괴석으로 장식하였다.
비원은 자연지세에 따라 누각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배치하였으며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차고 맑은 샘물로 애련지, 부용지 등 여러 연못을 채웠다. 이 물은 계속 흘러 창경궁 춘당지까지 이어지게 하였다. 특히 아름다운 정자는 부용정(芙蓉亭)으로 평면이 十자 모양의 겹처마 단층건물로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보이도록 지어졌다. 또한 건물의 일부를 연못 위로 내밀어 물위에 그림자를 비치게 하였으며 정자가 발을 담그고 있는 연못에는 작은 섬을 만들어 신선의 공간을 상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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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5.05.30
  • 저작시기2005.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9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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