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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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중운동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우리는 누구인가? -
1. 민족의 개념과 형성
2. 단군신화와 민족주의
3. 한국사에서 민족의 기원

- 12․3세기 농민 항쟁 Ⅰ -

- 12․13세기 농민항쟁 Ⅱ -

-도적의 사회사-

-조선 전기 농민층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저항-

-홍경래난․ 1862․1894년 농민전쟁 -나라를 구하고 우리의 살길을 찾으리라

-근대적 민족해방운동의 시작, 3․1 운동의 역사적 성격과 의의-

-냉전 희생의 섬, 제주도-

- 80년 광주민중항쟁 -

본문내용

슈로 전면 등장
-4월 14일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보도가 나오자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5월 2일부터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퇴진', '정부개헌 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요구'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
-5월 12일 밤 가두진출을 주장해 온 강경파 학생들의 광화문 일대 시위로 학생운동은 전면적인 '민주화투쟁'을 위한 가두시위로 나서게 됨
나) 서울역 회군
-1980년 5월 14일 새벽 4시 30분경,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서울지역 27개대학의 총학생회 대표 40여명이 모여 14일 오전부터 전면적인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 15일 오후, 서울역에는 10만에 육박하는 학생들이 집결, 그런데 각 대학 총학생회 대표들은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
5. 80년 봄 광주의 상황과 '517' 비상계엄령 확대
가) 민족민주화성회
-타지역에 비해 산업기반이 취약했던 광주전남지역은 당시 학생운동이 민주화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역량
-'1026사건'과 '1212사태'를 거치면서 학생운동은 학내민주화투쟁으로부터 민주화를 위한 정치투쟁으로 전환
-5월 14일 '민족민주화성회' 마지막 날 행사에서 학생들은 예정을 하루 앞당겨 당장 가두로 진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남대 총학생회는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5월 14일 오후부터 가두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정
-15일 오전에 전남대에서 '제3차 민족민주화성회'를 마친 1만여 명의 전남대 학생들과 조선대광주교대생 1만여 명, 전남대교수, 청년, 시민 등 수 만명의 인파가 도청 앞에 집결
-16일에는 광주 일원의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과 일부 고등학생들까지 합류한 일반시민 등 5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민족민주화성회'가 개최
 
나) 517비상계엄령 확대조치
-'1026사건'으로 야기된 지배권력의 내부적인 혼란이 신군부의 헤게모니 장악으로 일단락되면서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제도적으로 강화하고, 영구화하는 방안에 고심
-신군부는 무력으로 사회운동을 굴복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전면에 등장하여 명실상부하게 권력을 장악한다는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
-5월 20일경으로 예정된 임시국회에서 계엄해제안에 유정회까지도 가세할 움직임을 보이자 계엄령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신군부의 위기감 고조
-17일 자정을 기해 제주도가 제외되었던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하는 전국비상계엄령을 선포 , 자정을 전후해서 광주의 각 대학은 계엄군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 상당수가 검거
6. 광주민중항쟁의 발발 -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가) 비극의 시작
-1980년 5월 17일 21시 40분, 임시국무회의가 비상계엄 확대선포안을 의결하자 신군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대도시에 신속히 군대를 투입
-특히 서울과 광주가 신군부의 주요한 공격 목표,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치
나) 광주를 무차별 진압하라.-작전명령 '화련한 휴가'
-18일 오후까지의 학생시위는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경찰력만으로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
-7공수여단은 주둔지였던 대학교내를 나와 도청방향으로 전진하면서 금남로 및 카톨릭센타, 충장로 등을 중심으로 한 학살극이라 불러야 할 만큼 무자비하고 광폭한 시위진압
-신군부는 7공수여단이 광주시내 도청주변 시위진압 출동이전인 5월 18일 오후 2~3시경 광주에 11공수여단을 광주에 증파하기로 결정
-5월 19일 밤 12시, 3공수여단 증파로 광주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총원은 3,400여명
 
 다) 항쟁의 징후와 첫 발포
-20일 밤 11시경 광주 신역, 광주세무서, 조선대학교 부근에서 발포
-21일 오후 1시 정각, 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애국가에 때맞춰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집단발포
 라) 시민군 탄생과 공수부대 철수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정식 발포가 시작된지 2시간 20분 정도가 지난 21일 오후 3시 20분경부터 응사를 시작 
-무장한 시민들이 도청으로 끊임없이 압박해 들어가자 계엄군은 오후 5시 30분 총퇴각 결정
7. 5월 22일부터 27일까지의 상황
 - 시민공동체, 광주
 - 수습대책위원회 구성과 역할
 - 5월 23일의 상황
 - 수습위의 내부갈등
 - 광주시민 자발적 질서회복, 공동체 실현
- 26일 계엄군의 무조건 투항하라는 최후통첩
- 27일 새벽 ‘도청소탕작전’
8. 광주민중항쟁의 의의
-광주민중항쟁은 현상적으로는 7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이었다. 그리고 광주항쟁은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80년에 이르기까지 소수의 사회운동 진영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혈맹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항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신군부를 직간접으로 지원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러한 인식은 급속하게 깨져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80년 광주항쟁 이후 반미운동의 고양을 가져온 원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일반민주주의의 진전을 가져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80년 5월의 광주를, 나아가 '80년 봄의 민족민중운동을 부정하고 들어선 제5공화국은 자신의 허약한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일관하였다. 그때마다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 모아진 것은 이른바 '5월투쟁'이었다. '80년 이후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에서, 그리고 전국의 모든 대도시에서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억압적인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국민들의 단합된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던 독재체재가 어느정도 불식되었으며, 정부도 체제유지를 위하여 어느 정도 양보를 하여 미진한 수준에서나마 일반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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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1.23
  • 저작시기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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