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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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베르사유 체제와 독일의 전후보상

2. 제2차 세계대전의 내재적 원인

3. 제2차 세계대전의 국제적 배경

4. 전쟁의 발발 및 경과
(1) 영국, 독일 전쟁
(2) 독일과 소련의 전쟁
(3) 일본의 진주만 습격과 대동아공영권
(4) 연합국의 대공세
(5) 전쟁의 종결

5. 전쟁의 결과와 전후처리문제

6. 미, 소의 대립격화와 평화체제

7. 제2차 세계대전의 세계사적 영향

8. 제2차 세계대전의 한국에 대한 영향 고찰

9. 참고자료

본문내용

계기로 독립하였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 점령에 의한 군정을 겪게 되었는데, 남한에는 미군이 들어오고 북한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 1945년 9월 미국의 맥아더 사령부는 남한의 모든 통치권을 미군정 하에 두는 미군정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미군은 일본군 대표와 조선 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 시켰다.
한편 북한 지역에는 소련군이 평양에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공식적으로 결정하자 남한 지역의 국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는 신탁통치를 일제의 지배와 같은 것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편 북한 지역에서는 신탁통치 찬성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민족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46년 3월에는 제 1차 미 소 공동위원회가 서울 덕수궁에서 열렸다. 미국 측 수석대표는 아놀드 소장, 소련 측은 슈티코프 중장이었다.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개막 벽두부터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초청 문제를 놓고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소련 측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의에 따라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린 만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만 초청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 측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도 민주주의 정신에 따라 초청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못하자 미국 측은 5월 6일 임시정부수립문제는 뒤로 돌리고 38선 철폐 문제를 토의하자고 제안했으나 소련 측의 거부로 결렬되었으며 5월 8일부터 무기 휴회로 들어갔다.
한편 46년 3월에 신탁통치와 통일 임시정부수립 등에 대한 대립으로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3개월 후인 6월에 미군정청 주도 아래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었다. 46년 6월 14일 김규식, 원세훈, 여운형, 허헌 등 좌우 온건파 대표들이 좌우합작회담을 개시했으며 6월 30일 미군정청장 하지 중장의지지 성명도 나왔다. 좌우합작회담은 각 파벌의 협박과 반대 등 숱한 진통에도 46년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 구성 7개 원칙』을 합의 발표했다. 그 내용은 좌우합작으로 민주통일임시정부 수립, 미소 공동위원회의 속개 촉구, 토지와 주요 산업의 국유화 합의, 친일파 처리 원칙 합의, 정치범 석방과 테러 중지, 좌우합작위원회의 입법 기구 완전 통제, 언론 집회 등 기본권의 절대 보장 등이다. 그리고 이 좌우합작위원들은 미군정 과도입법의원의 관선 의원으로도 참가하기로 했다. 그러나 좌우 극단파들의 대립 격화, 이승만 측의 단정 추진, 미소 냉전의 심화와 제 2차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 등으로 좌우합작은 끝내 힘을 잃고 말았다. 그 후 2년이 지난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를 하였는데 다음은 이 당시 김구의 평양행을 반대하여 운집한 청중들에게 김구가 절절하게 호소한 연설의 일부분이다.
“독립운동으로 살아온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다. 더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 여러분들은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달라. 이대로 가면 한국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이북의 우리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봐야 한다”
이와 같은 연설을 하고도 막아서는 군중들의 눈을 피해 북행을 결행하였는데 비서와 아들을 대동한 단촐한 나들이였다. 연석회의에서 논의된 주제는 소련군과 미군의 철수, 그리고 철수 이후의 내전 불가, 민주주의 통일임시정부수립 후 중앙정부수립, 단독 정부수립 반대였다. 그리고 같은 달 27일 유엔의 남북한총선 결의에 따라 유엔 한국위원단이 한국에 도착(1948.1.7)했으나, 소련이 입북을 거부(1948년 1.23)하는 바람에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에서라도 총선을 실시하도록 다시 결의했다.
사태가 남북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수립으로 치닫자 김구, 김규식 등은 남북협상을 유엔한국위원회에 제안하는 한편 북쪽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남북협상의 현실적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고 8월 15일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출범하고 북한에서 48년 9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남북협상의 현실적 의미는 퇴색되어 버렸고, 회담은 결과적으로 북한정권의 정통성 선전에 이용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냉전이 계속되어 마침내 2년 후 한국 전쟁으로 폭발해버리고 말았는데, 한국을 방문한 맥아더 장군의 요청으로 미국이 참전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유엔군 사령부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가 가결되어 유엔은 최초로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휘기구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유엔 회원국들의 군사적 원조가 미국의 지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결의안도 통과되어 최초의 유엔군이 편성되었고 맥아더를 그 총사령관에 임명하였으며 한국군의 지휘군도 넘겨받아 그는 미군, 유엔군, 한국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한국 전쟁은 유엔군의 초반 열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과 중국의 인해술, 1.4 후퇴 등으로 밀고 밀리는 접전이 계속되다 1953년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3여 년 만에 끝났다.
이 한국 전쟁의 관련국 가운데 유엔군으로서 한국에 전투 부대를 파병한 나라는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타이, 그리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모두 16개국이다. 그리고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5개국은 의료 지원을 하였다. 또한 비UN국으로 일본이 비밀리에 해군을 참전시켰다. 공산군측은 소련과 중국이 개입하여 전쟁의 주인공인 대한민국과 북한을 합쳐 모두 26개국이 이 전쟁에 관련되어 있었다. 이처럼 제 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되어 냉전을 겪다 마침내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일어나고야 만 것이었다.
9. 참고자료
폴 헤이즈 外, 유럽 현대사의 제문제 1890∼1945, 명경
조성을, 세계대전과 동서냉전, 집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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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8.02.11
  • 저작시기2008.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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