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러일전쟁]청일전쟁의 배경, 청일전쟁의 전개, 청일전쟁의 결과, 청일전쟁과 조선의 역사적 관계, 러일전쟁의 배경, 러일전쟁의 전개, 러일전쟁의 결과, 러일전쟁과 조선의 역사적 관계 분석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청일전쟁][러일전쟁]청일전쟁의 배경, 청일전쟁의 전개, 청일전쟁의 결과, 청일전쟁과 조선의 역사적 관계, 러일전쟁의 배경, 러일전쟁의 전개, 러일전쟁의 결과, 러일전쟁과 조선의 역사적 관계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청일전쟁의 배경
1. 개요
2. 배경
1) 청의 국내사정
2) 일본의 국내사정
3) 영국의 상황
4) 러시아
5) 조선
6) 운요호 사건
7) 1876년 강화도 조약체결
8) 임오군란: 1882년
9) 갑신정변

Ⅲ. 청일전쟁의 전개와 결과

Ⅳ. 청일전쟁과 조선의 역사적 관계

Ⅴ. 러일전쟁의 배경
1. 개요
2. 배경

Ⅵ. 러일전쟁의 전개와 결과

Ⅶ. 러일전쟁과 조선의 역사적 관계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는 계속되는 패전으로 사기가 침체되고 그 해 1월 피의 일요일로 비롯된 군대의 반란과 농민폭동(제1차 혁명)이 일어나 혁명 진압이 급선무였다. 약 20억 엔[円]의 전비(戰費) 가운데 12억 엔의 공채 모집에 응함으로써 일본을 지원하였던 영국 미국도 일본의 승리가 만주의 단독 점령으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프랑스는 3,4월경 러 일 양국에 강화할 것을 종용하였고, 동해해전(東海海戰) 후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인 미국 대통령 T.루스벨트의 알선으로 8월 포츠머스 강화회의가 열렸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은 일본이 러시아를 압도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때문에가 아니라, 당시 동북아를 둘러싼 국제적인 역학관계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던데 있다. 일본의 전권(全權)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상, 러시아의 전권 비테 전 재무장관이 참가하여, 남 사할린 섬의 할양(割讓)을 내용으로 한 조약이 9월 5일 조인되고, 16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1905년 9월 5일에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Treaty of Portsmouth)은 전문 및 15개조로 되어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경제. 군사상 탁월한 권리를 가진 것을 인정하며, 일본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보호.및 감리조치에 간섭하지 않는다.(제 2조)
둘째, 러시아는 청국의 승인을 얻어 여순.대련 조차권과 이에 관련된 일체의 권리 특권을 일본에 양도한다.(제 5조)
셋째, 러시아는 장춘(長春).여순간의 철도 및 이와 관련된 일체의 권리특권을 일본에 양도한다.(제 6조)
넷째, 러시아는 북위.50도 이남의 사할린을 일본에 영구 양도한다.(제 9조)
다섯째, 러시아는 동해. 오호츠크해. 베링해에 연한러시아 영토연안에서의 어업권을 일본인에 허용한다.(제 11조)
이 조약에 의해 일본은 러시아의 요동반도 조차권을 계승함으로써 오랜 숙원이던 대륙정복의 확고한 기반을 획득하였고, 지역강대국으로서의 국제적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은 사실상 미.영.일.러 등 관계 강대국들이 모두 관여하여 체결된 조약이기 때문에, 일본의 한국 보호권이 국제적 승인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미,영 양국은 중국대륙진출을 시도하던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계획을 성취하였다. 반면 러시아는 아시아진출의 중요 기지를 잃고 제정 러시아의 부패하고 무능력한 모습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짜르 정부의 위신과 권위는 몹시 추락하였다. 그리고 수 십만 명의 사상자, 물가의 급등, 지나친 군대의 동원으로 극도로 피폐해진 인민들은 체제에 대한 불만이 무척 높아져 혁명의 도래가 촉진되었다. 그러나 인민들은 짜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가리고 있을 뿐 짜르는 진실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Ⅶ. 러일전쟁과 조선의 역사적 관계
러·일전쟁은 근대화 노력에 힘을 기울이고 있던 대한제국에 큰 타격을 가했다. 러·일 간에 전운이 짙어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局外中立)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2월 8일 인천과 여순에서 러시아를 공격한 후 2월 9일 서울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일본군은 3월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으로 재편됐고, 사령관의 계급도 소장에서 9월 대장으로 승격되었고 2월 11일 파블로프 주한러시아공사는 서둘러 서울을 떠났다. 하야시(林 權助) 주한일본공사는 조선 정부에 동맹 조약을 강요하여, 2월 23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했다. 그 내용은 한국은 일본에게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 한국과 일본은 상호 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협정의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말것 등을 규정했다. 3월 17일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이 특사로 서울에 도착, 한일의정서의 이행을 강요했다. 일본은 4월 1일 조선의 통신망을 접수했으며 병력과 군수물자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선 철도의 부설을 서둘렀다. 5월 18일 한국이 러시아와 맺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이권을 폐기하도록 강요당했다. 1904년 8월 22일 양국 간에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인 재정고문과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외교고문을 두고, 외국과의 조약 체결 때 일본 정부와 협의하도록 하는 이 조약은 재정과 외교의 실권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군사·경찰·교육·왕실 업무 등에도 조약에 없는 고문을 초청 형식으로 두게 함으로써 이른바 ‘고문(顧問)정치’를 시작했다.
Ⅷ. 결론
막부체제의 쇄국기에서 청일ㆍ러일 양대 전쟁을 거친 시기의 일본 외교의 기본 성격은 열강과의 협조ㆍ타협에 의한 세력균형 존중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 수동적이며 방어적이나 현실주의적이었음을 살펴본 바 있다. 구체적 외교 정책의 목표는 부국강병 및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제적 독립국가로서의 정립이었고, 이러한 목표는 불평등 조약의 개정과 대국 러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종결하면서 달성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정책의 결정과 집행의 주체는 메이지 유신 정권을 창설한 하급무사 출신의 번벌 세력으로서 이들은 쇄국기부터의 공통된 경험과 사상적 영향을 바탕으로 국내외 정치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의 현실주의적 외교관은 비단 자국의 안보 혹은 영토 수호에 머무른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동북아에서의 상대적 우위 확보를 위한 타국에 대한 무력 사용, 다시 말해, 청과 러시아와의 무력 대결을 통한 조선에 대한 불평등한 관계의 강요ㆍ점령이라는 팽창주의적 면모를 동반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 강재언(1984), 한국근대사연구, 한울
◎ 미치오 후지무라, 옮긴이: 허남린, 청일전쟁, 도서출판 소화
◎ 심헌용(2004), 국방부 군사 편찬 연구소, 러일전쟁과 한반도
◎ 최문형, 국제관계로 본 러일전쟁과 일본의 한국병합, 지식산업사
◎ 최문형(2004), (국제관계로 본) 러일전쟁과 일본의 한국 병합, 지식산업사
◎ 한국사연구회, 청일전쟁과한일관계, 도서출판 일조각
◎ 한국정치외교학회 편(1985), 갑신정변연구, 평민사

키워드

  • 가격5,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8.08.20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7644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