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되지 않도록 투명성을 보장하는 것도 신중한 정부라면 당연히 요구해야 할 사항이다. 신뢰란 개별 인간에게는 미덕이지만 국가간 관계에서 신뢰에만 의존하는 것은 때로는 무책임이나 경솔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또 신뢰란 상대방의 우호적 제스처(goodwill)를 일방적으로 믿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실천해나가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쌓이는 것이다. 남북경협이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시혜관계가 아니라 호혜적 상호이익의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최근 우리사회 일각에는 상호주의 원칙을 마치 불신에 근거한 냉전적 논리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상호주의는 결코 냉전적 원칙이 아니다. 의식하든 안하든 인간의 보편적인 형평감각이나 정의감각에 부합하는 가장 상식적이고도 일반적인 원칙이다. 물론 상호주의는 유연하게 적용되어야 하지만 그 원칙과 정신은 남북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각 분야의 교류협력의 핵심은 남북한 주민의 자유왕래의 실현이다. 정부는 이를 목표로 북한과 협상해야 한다. 우리 내부적으로도 우리 국민이 보다 자유롭게 북한을 왕래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주민들도 최대한 자유롭게 한국을 왕래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북측에 요구해야 한다. 과거 서독도 동독에게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는 대신 동서독 주민의 자유왕래를 비롯하여 분단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조치들을 요구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남북 양측이 자유왕래를 통해 서로의 모습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상호불신의 제거와 신뢰구축의 첫걸음이다.
4. 한반도 통일: 평화정착과 자유왕래의 실현이 통일의 지름길
새천년은 아시아시대라고 말한다. 21세기에 세계발전의 축은 아시아로 옮겨올 것이라고 말한다. 통일된 한국의 무한한 잠재력은 아시아시대의 주축이 될 것이다. 정상회담을 통해 우리 사회에 통일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특히 6.15 공동선언이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천명하고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 연방제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합의함으로써 갑자기 통일문제가 남북간의 핵심 화두로 등장했다. 통일은 우리 민족 누구나 마음 깊이 품고 있는 바램이지만 소망이나 기대만으로 이루어지는 문제는 아니다. 통일하겠다고 억지로 상이한 체제와 제도를 연방이나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짜깁기한다고 통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통일은 남북한이 평화공존의 틀 속에서 협력하는 가운데서 싹이 틀 것이다. 한반도에 평화와 협력이 정착되고 남북한을 단절하는 장벽이 제거되어 주민의 자유로운 왕래가 실현될 때 통일의 기회는 우리 앞에 소리 없이 다가올 것이다. 우리의 학생들이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명사십리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그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비행기로, 자동차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그 날이 먼 장래만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이와 같이 자유왕래가 실현될 때 우리는 통일이 방문 앞에 와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남북한간 자유왕래의 실현이야말로 바로 통일의 지름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일의 그 날을 대비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내부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깨끗한 정치를 뿌리내리고 경제를 튼튼히 해야 하며, 국민대통합으로 건강하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통일에 대비한 외교적 노력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한반도의 통일은 물론 한국인이 이룩해야 할 과제이지만, 우리 주변국의 협조와 지지 없이는 어려운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국제사회와 우리 주변국의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약속을 지키고, 눈앞의 이익보다는 먼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로운 외교를 해야 한다. 이와 함께 통일은 한반도 전체에 걸쳐 정치적, 경제적 자유가 실현되고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통일을 준비하는 바른 길이다.
Ⅸ. 결론
우리는 오늘날 탈냉전의 시대에 살고 있다. 탈냉전이란 무엇인가. 냉전이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군사적으로 적대적인 두 진영의 대립구도를 말한다면 탈냉전은 이러한 대립구도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와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구상에서 전쟁이 사라졌다거나, 분쟁이 감소한다는 것을 자동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걸프 전쟁을 필두로 체첸 전쟁, 코소보 전쟁, 그리고 이라크 전쟁 등 큰 전쟁들이 발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작은 분쟁들은 수도 없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했을 때 마치 ‘우리’(자유진영)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원인’이 제거된 것처럼 착각했던 기억도 있지만, 실제로 상황은 더 나빠졌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마치 한반도 통일--한반도 문제의 종국적인 해결을 의미하는--을 담보하는 신호탄으로 비쳐졌지만, 현실은 이내 그러한 기대를 배반했다. 심지어 북한체제 최고의 지도자이자 체제 정체성의 근원(根源)인 김일성 주석의 사망은 북한체제의 붕괴를 예상케 하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다가왔지만 이것 역시 우리의 기대를 무참하게 저버렸다. 오히려 남북한 관계는 만조(滿潮)와 간조(干潮)를 반복하면서 상당한 교류·협력의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북핵 위기가 발생함으로써 과거 1980년대까지의 안보적 위협 이상의 위협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참고문헌
▷ 강정구(2000), 통일시대의 민족통일, 현대 한국사회의 이해와 전망, 한울
▷ 구영록(2000), 한국과 햇볕정책 기능주의와 남북한관계, 서울 법문사
▷ 김재홍(1999), 한국의 대북정책,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통일전략포럼 4월22일 주제발표논문
▷ 동북아 평화 연구회(1999) 국민의 정부, 대북 포용정책, 동북아 평화, 대북 햇볕 정책의 평가와 실효성 제고 방안, 김구섭 논문 참조
▷ 박승덕(2000), 김대중 정부의 남북화해정책과 정치커뮤니케이션, 한국통일안보학회 제3회 학술대회논문집
▷ 한선주(2000), 김대중 정부의 남북화해정책과 정치커뮤니케이션, 한국통일안보학회 제3회 학술대회논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