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통일정책][남북통일][남한과 북한 남북통일정책 비교][독일 통일 사례]남북통일정책의 역사, 남북통일정책의 성격, 남한과 북한의 남북통일정책 비교, 남북통일정책의 장애 요인, 독일의 통일 사례, 제언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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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정책][남북통일][남한과 북한 남북통일정책 비교][독일 통일 사례]남북통일정책의 역사, 남북통일정책의 성격, 남한과 북한의 남북통일정책 비교, 남북통일정책의 장애 요인, 독일의 통일 사례, 제언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통일의 개념

Ⅲ. 남북통일정책의 역사

Ⅳ. 남북통일정책의 성격

Ⅴ. 남한과 북한의 남북통일정책 비교
1.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 방안
2.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Ⅵ. 남북통일정책의 장애 요인

Ⅶ. 독일의 통일 사례
1. 경제 분야
2. 인적 분야
3. 사회·문화 분야
1) 대중매체의 공유 아닌 공유
2) 체신교류·협력
3) 문화·체육교류·협력

Ⅷ. 결론 및 제언

참고문헌

본문내용

동서독은 제한 없이 상대방 TV나 라디오방송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다. 동독당국은 사회주의 문화기반과 사회주의 국민정체성 등이 잠식당할 것을 우려해서 서독의 TV와 라디오 청취를 금지하였으나 방해전파를 발사하지는 않았다.
2) 체신교류·협력
서독은 인적교류를 비롯한 교류협력이 증진되기 위해서는 우편 및 통신과 같은 체신교류가 시급하다고 여겼다. 1971년 1월 31일 동서베를린 간 전화통화가 재개됨과 아울러 우편과 통신개선에 관한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1976년 3월 동서독간 우편, 전화소통을 국내우편으로 취급하기 위한 우편·전화협정을 체결하였다. 1977년 10월 19일 동서독간 체신청 대표에 의해 1982년까지 서베를린을 포함한 동서독간 7백 2개선의 새로운 자동식 전화가설을 합의하였다. 서독에서 주민들이 동독으로 하는 전화는 무료로 정부가 부담하였으나, 동독에서 서독으로 하는 전화료는 동독주민의 부담으로, 수익자부담원칙을 시행해서 대부분 서독주민들이 전화를 많이 이용했다. 그리고 우편물 교류는 1일 1회식 경계선의 교환장소에서 편지, 소포 등 하루에 10만 여건의 우편물을 상호 교환하였다. 특히, 편지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발송하는 것이 많았고, 소포는 서독에서 동독으로 우송되는 것이 많았다. 이와 같은 체신교류의 개선과 증진으로 경제 및 인적교류 등 다른 분야의 교류를 확대할 수 있었다.
3) 문화·체육교류·협력
서독은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한 문화교류를 적극 추진하였다. 상이한 정치체제에 따른 문화의 변질과 고착화를 최소화하여 이질감을 해소하고 상호신뢰의 폭을 확장시키려는 전략이었다. 더 나아가 민족공동체의식과 민족문화의 공감대와 자긍심을 고양하고자 함이었다. 서독정부는 정부 차원의 문화교류와 병행하여 민간인과 민간단체 중심의 문화교류를 적극 권장하였다. 이러한 문화교류는 순수하게 문화활동 중심으로 문화예술인의 상호교환과 전시회, 공연, 학술회의, 청소년 문화교류 등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2차 대전 당시 보호 차원으로 분산되었던 문화재 제 자리 찾기에 합의하여 문화재 및 역사유물 등을 돌려주었다. 동서독은 라이프치히 합창단, 함부르크 오페라단, 뮌헨필하모니 등의 교환공연이 꾸준히 이루어졌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는 동독 민간예술단으로 구성된 뮌헨올림픽 축하 공연단이 서독을 방문하여 순회공연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미술분야에서도 특히 1986년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열린 바로크 전시회에 10만 명의 서독주민들이 관람하기도 하였다. 학술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학자들의 회합·회의 파견과는 별도로 대학생을 비롯한 신진 소장학자를 교환·초청하여 일정기간 연수 프로그램에 의거 상호 이해를 넓히기도 했다. 연수생들에게는 서로 장학금을 지급하며 기간은 1·6개월 간으로 1988·1989년 중 동독측에서 300명, 서독측에서 110명이 상호교환 형식으로 오고 갔다. 한편, 체육교류 특히 민간중심의 체육교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상호 평화공존과 신뢰회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동서독은 1955년 올림픽 단일팀 구성에 합의하여 1956년 멜버른 올림픽, 1960년 로마 올림픽,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3회 연속 출전하였다. 단일팀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한 수차례의 회의 및 예선전은 민족공동체의식을 확인할 수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베를린장벽 설치와 동독선수들의 국외 탈출이 자주 발생하자 체육교류 또한 냉각되기도 했다. 이에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는 동독은 독자팀으로 출전하였다. 서독은 1969년 서독 내 실시되는 국제 체육행사에 동독의 국기게양과 국가연주를 허용하며 동독선수의 단독 참가를 허용하였다. 1970년에는 동서독간 체육회담이 열려 체육교류를 다시 재개하였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 동독의 개별참가를 허용하였다. 1974년 체육관계규칙에 관한 의정서에 합의함으로써 동서독간 체육교류는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다. 동서독간 체육교류는 동독은 엘리트체육선수 위주의 교류로 제한하였지만, 서독은 청소년 및 대중체육의 교류확대에 노력하였다.
Ⅷ. 결론 및 제언
우리는 지금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오명과 함께 지난 반세기동안 지속되어온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는 남과 북의 이질성을 점점 증대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이질성은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자칫 잊어버리게 만들거나 향후 이루어질 통일의 커다란 장애요소가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냉전의 영향으로 인하여 분단된 남북한은 탈냉전기의 새로운 국제질서 하에서도 금방 해결될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통일이 눈앞에 있지 않다고 해서 통일을 포기하고 남과 북은 별개라는 사고로 살아가야 하는가? 결코 이러한 질문의 대답에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남과 북은 한 민족이며 같은 피가 흐르는 그들이 아닌 우리이다. 비록 원치 않게 냉전이라는 지난 역사의 희생양으로 분단되었지만 남과 북은 하나이며 한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일이 이루어져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통일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할 것이다. 통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당위의 문제이다. 남한과 북한은 이러한 한민족의 당위인 통일을 위하여 분단이후 지속적인 노력을 해왔다. 자칫 남한만이 통일을 위해 노력해왔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실제 북한의 경우에도 지속적인 남북한 통일을 추구해왔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남한과 북한은 통일을 추구함에 있어 그 방법과 정책이 다르기에 많은 갈등이 있어 왔으며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남북한 분단은 고착화 되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강광식, 우리의 통일정책, 서울 : 국토통일원 통일연구소, 1982
○ 김경태, 민주통일론, 통일연수원, 1991
○ 김학준, 반외세의 통일논의, 서울 : 형설사, 1980
○ 동·서독 정상회담 사례집, 통일부, 2000
○ 박재윤·백성준, 독일의 교육통합, 서울: 한국교육개발원,1992
○ 신세호 외, 독일교육통합과 파생문제점 분석연구, 서울: 한국교육개발원, 1993
○ 유석렬, 남북한 통일론, 서울 : 법문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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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2.20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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