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창지역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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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마.창지역의 문화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창원지방의 문화재

1) 보물

2)사적

3)천연 기념물

4)지방 유형문화재

5)지방 무형문화재

6)지방기념물

7)문화재 자료

▶마산지방의 문화재

1)유형문화재

2)기념물

3)문화재 자료

4)무형 문화재

『 참고문헌 』

본문내용

치 : 마산시 교방동 237
-내용 : 회원서원(會原書院)이 있었다 하여 서원곡(書院谷)이라 부른다. 조선중기의 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선생을 추모하는 뜻으로 그의 문하생인 장문재(張文哉)선생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서원은 고종(高宗)때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지고 정자만 남아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을 중심으로 외삼문(外三門), 관리사(管理舍)등이 있다. 해마다 음력(陰曆) 3월과 9월에 한강(寒岡)과 그의 문하생인 미수 허목(許穆)의 향사(享祀)를 모시고 있다.
관해정 앞에 있는 수령(樹齡) 440년의 은행나무는 한강(寒岡)이 손수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②몽고정
-지정이름 : 제 82호(1983)
-위치 : 마산시 자산동 118
-내용 : 고려말 충렬왕 7년(1281) 원나라 세조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두었으나, 일본 정벌이 2차에 걸쳐 실패로 돌아간 同年 10월에 연해방비를 위해 이곳 환주산(環珠山)(현 자산동 무학초등학교 뒤쪽 마산시립박물관일대)에 둔진(屯鎭)을 설치하였다.
이 몽고정은 이곳의 둔진군(屯鎭軍)이 용수(用水)를 쓰기 위해 만들었던 우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고정 맷돌’이라고 불리는 직격 1.4m가량의 원방형(圓方形)의 돌이 몽고정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를 차륜(車輪)이라는 설도 있으나 맷돌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물곁의 석비에 몽고정(蒙古井)이라 써서 세워둔 것은 1932년 마산 고적보존회(일본인 고적단체)가 멸시적 감정에서 명명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고려정이라 불렸을 것이다.
③위암 장지연 묘
-지정이름 : 제 94호(1983)
-위치 : 마산시 현동 631-2
-내용 : 근대의 대표적인 언론인이며 우국지사 장지연 선생의 묘이다. 선생은 고종(高宗)원년(1864)에 경북 상주(尙州)에서 출생하였다. 자(字)는 순소(蕣韶), 호(號)는 위암(韋庵)이며 고종 31년(1894)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자 항일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었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간섭이 커지자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898년 내부(內部) 주사(主事)의 관직을 남궁억(南宮憶), 유근(柳謹)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에도 가담하여 이상재(李商在), 이승만(李承晩) 등과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란 사설을 써서 일제 침략 흉계를 통박하고 이를 국민에게 알렸으며, 이로 인해 투옥되었다.
이듬해 1월 출옥한 후 4월에 윤효정(尹孝定), 나수연(羅壽淵)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민족독립을 위한 실력을 기르는 일에 힘썼다.
자강회가 강제로 해산되자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개편, 활동하다가 1908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해조신문(海潮新聞)의 주필이 되었다.
그 뒤 중국 각지로 유랑하다 귀국 후 진주의 경남일보 주필이 되었으나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뒤 실의에 빠져있다가 1921년 마산에서 돌아가셨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鄲章)이 수여되었다
④경행재
-지정이름 : 제 132호(1985)
-위치 : 마산시 진전면 오서리
-내용 : 본 경행재(景行齎)는 창원지구 안동권씨문중(安東權氏門中)의 문화보고였던 회계서원의 지원(支院)격으로 1867년 3월에 건립된 건물이다.
건립초기에는 문중(門中)의 재실(齋室) 겸 한학(漢學)의 서숙(暑塾)으로 사용되었으나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1910년부터는 사립 경행학교의 교사(校舍)로 사용되었다.
경행학교는 이 지방 신식교육(新式敎育)의 전당이었을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요람이기도 하여 많은 애국열사를 배출하였는데 대표적 인물로는 상해임시정부에 활동하다 순국한 죽헌(竹軒) 이교재(李敎載)선생과 3.1독립운동시 삼진(三鎭)지구의 주역이었던 백당(白堂) 권영조의사(權寧祚義士)를 꼽을 수 있다.
1927년 일제에 의한 공립보통학교 신설로 폐교 당한 이후에는 지역 행사나 강습장, 회의장 등 지역의 문화시설로 이용되어 왔다.
원래 삼량가(三梁家) 형식의 4반칸에 팔작기와 지붕과 우물마루를 갖추었던 본 건물은 1988년 2월의 보수공사시 누마룩 증축되어 규모가 늘었으나 외관상의 큰 변화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4)무형 문화재
①불모산 영상재
-지정이름 : 제 22호(2002)
-위치 : 마산시 교방동 489
-내용 : 영산재는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모습을 재연한 불교의례 의식으로서, 진행할 때는 범패(梵唄)가 불리어진다.
통영과 고성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된 쌍계사·화엄사중심소리를 우담스님이 창원 성주사, 김해 장유암, 마산 근교에서 주석하면서 계승 발전시킨 것이 현재, 마산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불모산 범패다. 이후 명해, 벽봉스님들에 의해 재현되어 오던 마산 불모산 범패는 그 스님들이 입적한 뒤 마산 백운산 석봉스님 외 문하 도반스님들에 의해 계승되어 있다.
영산회상의 줄인 말인 영산은 석가모니가 영취산에 계시면서 설법하시던 때의 모임으로, 이 법회에 동참한 모든 청문중(聽聞衆)과 외호중(外濠衆)은 물론, 사방의 제석천왕과 수많은 보살, 신중 등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환희하였는데, 하늘에는 만다라 꽃이 날리고 묘음보살(妙音菩薩)과 천동천녀(天童天女)가 내려와 꽃과 향, 기악과 가무로써 공양하였던 당시의 광경을 상징화한 의식절차가 바로 영산재다.
따라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스님들의 의식공양인 영산재는 오늘날에는 의식 진행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법화사상을 중심으로 국난이나 궁운융창, 사회발전, 개인의 안녕은 물론, 천도의식으로써 봉행되어지고 있다.
마산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불모산 영산재는 불모산 계통의 소리와 법무작법(法舞作法)으로 재현된 이 지역의 대표적인 불교의례라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 http://www.cwculture.wo.to/ (창원의 문화재)
- http://changwon.go.kr/ (창원시청)
- http://www.masan.go.kr/ (마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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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2.25
  • 저작시기20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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