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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제암리학살사건

Ⅱ. 난징대학살사건

Ⅲ. 제주43학살사건

Ⅳ. 315마산학살사건
1. 3.15마산학살사건의 내용
2. 불완전한 민주주의
1) 역사정신과 지배세력
2) 가해자 문제
3) 1960년대의 3.15 의거 정신 규정

Ⅴ. 광주518학살사건

참고문헌

본문내용

주둔- 훈련하던 제 7공수단이 시위 대학생과 그 외에도 여학생과 시민들까지도 무차별 살상·구타하였다. 이에 광주의 가층민들은 분노를 느껴 시위에 참가하게 되어 시위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이런 계기로 폭발한 광주민주화운동은 여러 배경이 있었다. 그것을 살펴보면, 유신체제하에서 폭압적인 지배구조에 억눌렸던 정치의식과 저임금, 저곡가 정책으로 고착된 민중수탈 구조의 결과물로써 열악한 민중의 생활이라 할 수 있고, 유신정권의 편향적인 지역개발정책으로 인한 상대적인 불만과 소외감이 심화됐다.
80년대 초기 고양된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이 민중들의 전반적인 정치의식이 성숙됐다. 5월 15일·16일 양일 간의 학생시위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함으로써 학생들과 일정한 연대의식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과 이 과정 속에서 성숙된 정치문제를 현실적인 운동역량으로 변화·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전라도 지방의 상징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진 김대중씨의 대한 탄압 등이다.
항쟁의 과정을 살펴보면 5월 18일 광주 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며 투쟁에 나섰다. 신군부가 동원한 공수부대는 상상조차할 수 없는 야만적인 폭력을 마구 저질렀다. 평화시위로 맞서던 광주의 시위양상은 폭력항쟁으로 바뀌었다. 시민과 학생들은 5월 19일 오전부터 금남로에 모여 군부의 정치 개입을 규탄하는 연좌시위를 열었다. 시민은 자기를 지킬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인 돌과 각목을 들어 계엄군의 폭력진압에 맞았다. 공수부대는 공포의 유혈진압을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흩어지고 모이기를 되풀이 하는데 시위대열은 차츰불어났다.
20일에는 차량 시위를 하는등 투쟁은 한층 결렬해졌다. 시위대는 광주시민을 폭도로 왜곡하여 편파보도하는 MBC와 KBS방송국을 응징하였다. 일부 청년과 시민들은 차량을 나누어 타고 광주를 빠져나가 전남일대를 누비며 진실을 알리고 시위를 널리 퍼뜨렸다.
노동자·농민·청년학생 등 광주의 모든 애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고 광주를 지키려고 굳게 단결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계엄군에 맞섰다. 마침내 공수부대의 폭압적인 진압은 국민의 군대가 국민의 심장을 향해 마구 발포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시위 군중은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관청을 습격해 무기를 획득하여 무장하였다. 상황은 삽시간에 시가전의 양상으로 바뀌고 시내 곳곳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21일 밤을 고비로 계엄군은 무장시위대의 거센공격을 견딜 수 없어 도청을 빠져 나갔다. 광주 시민들이 국민을 살상한 ‘폭도’를 몰아내고 마침내 광주를 해방 공동체로 만든 것이다. 해방된 광주 첫날 22일 분명 학살자는 물러가고 광주가 광주시민의 것이 되었지만이 과정에서 기존의 질서는 모두 붕괴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시민들은 변화된 상황에 맞게 새로운 질서를 갖추어야 했다.
우선 교통·통신이 완전히 두절되어 있었던 만큼 생활 필수품 부족현상이 큰 문제로 다가왔다. 게다가 전남 일원으로 통하는 국도마저 계엄군이 완전히 차단하여 불안감을 더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이러한 악조건을 지혜롭게 대처했다. 이로부터 광주시민이 지금까지도 높은 긍지를 갖고있는 공동체적 상호 협력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광주시민은 매점매석을 방지함으로써 제한된 생필품을 최대한 활용했다. 쌀집에서는 한꺼번에 두 되 이상의 쌀을 팔지 않았고, 담배 가게 주인은 한 사람에게 한 갑씩만 담배를 팔았다. 슈퍼마켓이나 식료품점도 마친가지였다. 이 모든 것은 그 누구에 위해서 강요된 적 없이 모두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지켜졌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기간 동안 평소에 흔히 있던 강도나 절도 등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와 함께 시민군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시내 치안과 경비를 맡았다. 교통 역시 시민군이 확보한 차량을 동원하여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해결하였다.
이로써 광주시민들은 인간이 투쟁을 통해 얼마나 고결해 질 수 있는가를, 그리고 우리 민중이 얼마만큼 성숙된 자치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또한 해방 광주는 기존의 낡은 질서가 부너진 속에서 민중 자신들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우지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감격의 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 질서가 붕괴되면 오직 혼란만 존재한다는, 통치자들의 교설이 갖는 기만성이 낱낱이 폭로 되었다.
23일 이후, 광주 시민은 도청 앞 광장에서 여러 차례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 대회를 열고 투쟁의지를 가다듬었다. 이러한 가운데 25일 밤, 광주 시민은 새로운 항쟁 지도부를 결성하였다. 이튿날 오후 항쟁 지도부는 제 5차 궐기 대회를 열고, ‘80만 광주 민주 시민의 결의’를 채택하였다. 광주 시민은 , ① 모든 책임은 과도 정부에 있다. ②계엄령 해제, ③ 전두환 공개 처단, ④ 민주 인사 석방을, 구국 과도 정부 수립, ⑤ 허위 조작, 왜곡 보도 중지, ⑥ 피해 보상과 연행자 석방만이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 수립, ⑦ 끝까지 투쟁할 것 등 7개 항을 문제 해결을 위한 요구 조건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정부는 광주를 고립시키고 시민군을 분열시키려는 데만 눈이 벌개졌을 뿐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계엄군이 광주를 다시 공격해 올 것이 확실해지면서, 항쟁 지도부는 시민군을 다시 편성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계엄군과의 마지막 항쟁을 준비하였다. 27일 새벽, 계엄군은 극비리에 작전을 개시하여, 물밀 듯 시내로 밀고 들어왔다. 학살 만행에 치를 떨며 일어선 시민군은 계엄군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광주 민중항쟁의 정당성을 끝까지 지키려고 마지막까지 죽음으로 도청을 지켰다.
참고문헌
◇ 기든스, 앤써니, 진덕규 역(1991), 민족국가와 폭력, 삼지원
◇ 권귀숙(2001), 제주 4·3의 사회적 기억, 한국사회학, 35집 5호
◇ 부산매일(1992), 울부짖는 원혼
◇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1997), 제주도 4·3피해조사 보고서(수정·보완판)
◇ 테르본, 괴란, 최종렬 역(1997), 권력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권력, 백의
◇ 헨더슨, 그레고리, 박행웅·이종삼 역(2000),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한울
◇ MBS제작(2005), 세계를 뒤흔든 순간 난징대학살 1,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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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1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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