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동강댐의 건설계획&과정&동강댐 백지화에 이르기까지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환경]동강댐의 건설계획&과정&동강댐 백지화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동강에 대한 소개

2.동강댐 건설 전개과정 및 백지화 과정
(1) 동강댐 건설 배경
(2) 동강댐 건설 문제 제기
(3) 쟁점토론

3. 환경영향평가서의 문제점

4. 동강댐 건설을 둘러싼 갈등의 과정 및 구조

5. 동강댐 건설 백지화

6.동강댐 건설백지화의 의의

7.동강의 보존 대책

8.결론

**외국사례

본문내용

력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강댐 백지화운동은 단순한 집회나 시위에 그치지 않고 전문가의 조사를 토대로 발전된 모습의 운동방식을 지향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무조건 자신들의 목표를 관철시키는 데 현안이 되지 않고,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했을 때에 생길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90년대 이후 활발해진 시민단체의 활동에는 항상 학계와 언론계의 뒷받침이 있었다. 대표적 시민운동단체라고 할 수 있는 경실련과 참여연대는 핵심 구성원들의 대부분이 학계나 전문직 분야에 기반을 두고 있고, 활동의 성과는 언론에 보도되어 힘을 얻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강댐 백지화운동을 인터넷과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문제를 여론화시켰던 과정은 정보화시대의 여론화 과정의 표본이 될 수 있었고 시민단체의 조직적이고도 연대적인 활동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운동을 통해, 과거와 같이 반대를 위한 반대나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고발성 운동만으로는 사업의 지연을 가져오고 인력과 돈의 낭비만 가져온다는 것은 명백해 졌다.
앞으로의 환경 운동은 보다 조직화되어야 하고 치밀한 기획과 결과 평가가 수행되어야 하며 정보와 자료 축적 및 사실 조사에 근거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시민들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서 별다른 공헌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외국사례
***석회암 지층 및 불안정한 지층에 세워진 대형 댐
석회암 층에 세워진 바이온트 댐 참사1963년 이탈리아의 피아페 계곡에서 2천6백명의 인명을 앗아간 기록적인 대홍수가 났다. 산사태로 말미암아 2백74m2 이상의 암석이 바이온트 댐 저수지에 쏟아져 내려왔고 높이 110m 이상의 산더미 같은 파도가 댐을 넘어 고요히 잠자던 하류의 마을을 덮쳤다.
1960년 세워진 바이온트댐은 석회암 지대인 이탈리아 북동부 알프스의 고지대를 흐르는 바이온트 강에 세워진 높이 262m (영월댐 105m 이하 괄호는 영월댐의 경우임) 의 아치 댐으로 수력발전이 주목적 이였으며 홍수조절은 부차적 문제로 건설된 다목적 댐이였다.
댐의 배후에는 계획 저수용량 1억7천m3 (7억6천8백만m3) 의 저수지가 생겼으며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불안정한 지층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토그산이 저수지 남쪽에 있었다. 이때에도 많은 지질학자와 공학자들은 비교적 소규모의 산사태는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만, 안정성을 갖게 될 것으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기술자들은 토그산의 사면을 완전히 안전한 것으로 보지 않고 그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바이온트댐이 담수를 시작하자 토그산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댐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그 이동 정도는 심해졌다. 산에 있던 바위들의 이동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댐과 그 저수지에 대한 발전의 욕구는 강했다. 1963년 3월 기술자들은 충분히 조심하면서 댐 꼭대기에 있는 방수로로부터 23m 되는 데까지 수위를 올리기로 했다. 그들은 산으로부터의 위험은 결국 감소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철 호우로 저수지의 수위가 댐 정상부로부터 불과 12.5m 까지 육박했다. 그러자 산 위에서의 바위의 움직임도 놀랄 만큼 빨라졌다. 즉각 저수위를 내렸지만 이때에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힘이 작용하기 시작한 후여서 크리프, 즉 지층표면이 산비탈을 따라 서서히 이동하는 현상은 멎지 않았다. 또한 계속되는 비는 저수지 수위 내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고 산비탈도 잔뜩 물을 빨아 들였다. 지하수면의 상승으로 산 위쪽에 압력이 미치자 비탈의 낮은 부분에 있는 지표 밑의 암반을 흔들어서 이동시키고 있었다.
10월 1일 토크산의 산비탈에서 풀을 뜯고 있던 동물들은 목초지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발아래 대지의 미묘한 움직임에 대해 인간보다 예민했던 것이다. 10월8일 기술자들은 그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5배나 더 넓은 면적의 바위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저수지를 구하고 위험한 바위덩어리들 밑에 있는 지하수면을 내리기 위해 매초당 140t 의 물을 방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3년 10월 9일 밤 10시 41분 40초, 토그산의 산복이 바이온트 저수지로 쏟아져 내렸다. 그 결과 저수량보다도 많은 2억 4천 m3 이상의 암석이 초속 30m 의 속도로 저수지로 쏟아졌고 그리고 막대한 양의 물이 댐으로부터 넘쳐 나왔다.
그 와중에서도 댐은 온전했으나 높이 70m의 파도는 롱가로네시와 피라고, 발라노바, 리발타 등 여러 마을을 덮치고 15분만에 물이 빠져나갔다.
그 뒤에는 2천 6백구의 시체가 남았다.
불안정지층에 세워진 댐들의 붕괴 사례
스페인의 구아달렌틴강에 건설된 푸엔테스탬은 1791년 완공되었다가 11년간 지탱하다가 무너졌다. 이 댐의 경우 11년간 지탱한 자체가 기적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댐구조물의 기반은 경암이 옆으로 갈라져 있고 거기에 자갈과 흙이 느슨하게 깔리 토적층이 깊숙이 들어가 있어 댐의 중량을 이겨낼 수 없는 경우였다. 이 댐의 붕괴로 6백 7명이 사망했다.
1926년 지질을 무시한 채 댐이 건설되었던 산프란시스탬은 4백20명의 인명을 살상한 채 끝났다. 산프란시스댐은 미세한 진흙과 지름 20m이상이나 되는 것도 있는 돌 부스러기, 점토 등 온갖 크기의 토양입자가 섞여 있는 역암의 두꺼운 퇴적층이 있는 곳에 세워졌다. 특히 이 역암 층의 옆은 무른 운모편암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쪼개져서 슬레트 모양의 얇고 평평한 파편이 되는 성질이 있으며 운모편암 사이사이에는 활석이 산재해 있어 편암은 한층 사태를 일으키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
※ 참고문헌 ※
우리가 영원히 흐르는 동강을 보리라 / 환경운동연합. 동강댐 공동조사단 보고대회
(2000年 : 서울) 서울 : 환경운동연합, 2000.
김병완. 『한국의 환경정책과 녹색운동』. 서울: 나남출판사. 1997
http://kfem.or.kr/kfem/donggang/
동강 보존본부 http://www.dongriver.com/
환경운동연합 http://kfem.or.kr/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9.06.18
  • 저작시기2009.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4203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