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帝國의 汗位 繼承分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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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유목민족의 汗位 계승
1. 유목국가의 칸위 分爭
2. 遼·金의 칸위 계승분쟁

Ⅲ. 몽골민족의 發興
1. 칭기스칸의 정복전쟁
2. 몽골제국의 칸위 계승분쟁
3. 뭉케 汗에서 쿠빌라이 汗의 즉위

Ⅳ. 元 帝國 成立 이후의 皇帝 계승
1. 원 제국의 성립과 4개의 울루스
2. 원 제국 건설이후의 황제계승

Ⅴ. 제위 계승에 皇后의 登場

Ⅵ. 칸위 계승의 특성(特性)과 모호성

Ⅶ. 나오며

본문내용

위하였다. 우구데이의 즉위 과정을 비롯해서 이후 몽골 제국은 칸위 계승분쟁이 발생한다. 중국의 史書를 통해 엿볼 수 있는 북방민족의 칸위계승은 적장자(嫡長子)에 의한 한족(漢族)의 제위계승(帝位繼承)과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었다. 북방민족의 전통적인 칸위계승 방법은 유력한 노얀(Noyan)이라고 하는 몽골의 씨족장들에 의한 선거제였다. 몽고족은 이를 쿠릴타이(Kuriltai)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유목제국에서 대칸권의 계승은 제국의 분열과 멸망을 부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당시 제국에서의 帝位는 일정한 세습의 원칙이 없었으며, 그 기저를 흐르고 있는 기본정신은 제위 선출의 쿠릴타이를 통해 유목국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을 군주로 선출한다는 적임자(適任者) 계승제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몽골제국의 왕위계승은 유목사회의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군주(君主)의 자리는 각 부족이 공동소유한다는 공유관념이 그 원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몽골제국에서는 새로운 대칸이 선출될 때마다 가장 적합한 대칸을 찾기 위한 쿠릴타이가 개최됐고, 그 과정에서 제위 계승자들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각종 사여(賜與)를 남발했으며, 황금씨족 칭기스칸 씨족과 후손을 황금씨족이라고 하며, 이후 몽골제국의 칸위는 황금씨족만이 즉위할 수 있는 있는 것이었다.
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소모적인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했다.
칭기스칸 사후 빈번하게 발생한 계승분쟁은 몽골제국의 칸위 계승권자 자격 규정의 모호성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모호성은 독립적 성향을 갖은 제왕들의 분권화 지향과 맞물려 그 후 몽골제국의 제위 계승과 관련해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즉 칭기스칸은 몽골 제국을 나누어 자제(子弟)에게 분봉하였는데 이러한 분봉(分封) 몽골제국의 지속적인 정복전쟁의 원인은 바로 유목사회에 존재하는 약탈물의 분배라는 형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즉 칭기스칸은 정복전쟁에서 얻은 영토를 자기의 가산(家産)으로 생각하였고
을 통해 독립적 성향을 갖게 된 자제(子弟) 울루스 처음 칭기스칸이 몽골제국을 건설하여 그의 자제들에게 분봉을 실시하면서 토지(土地)와 領民을 동시에 나누어 주었는데, 그 분봉지를 '울루스'라고 한다.
의 제왕들은 만장일치의 합의 도출기구였던 쿠릴타이에서 제위 계승권자의 자격에 대한 불명확성을 이용해 몽골제국의 제위 계승에 깊이 간여했고, 이를 통해 각각의 울루스(Ulus)의 독립성을 확보해 나갔다. 윤은숙, 「앞의 논문」, pp.229~230.
이러한 분봉은 배타적인 소유권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봉은 곧 지방분권화를 촉진하면서 중앙집권화에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중앙과 지방의 끊임없는 대립과 마찰을 야기하면서 크게는 칸위계승분쟁에서 작게는 중앙의 지배권을 관철시키기 위해 울루스내 여러 가지 분쟁에 개입하기도 하였다. 申採湜, 『앞의 책』, pp.509~510.
Ⅶ. 나오며
이상으로 몽골족이 중앙아시아에 등장하여 세계제국을 건설하고 계승분쟁을 중심으로 제국의 쇠퇴를 살펴보았다. 몽골 제국의 분봉제도 즉, 제국 전체를 ‘가산(家産)’으로 보는 관념에 바탕을 둔 칭기스 일가의 분봉은 바로 지속적인 정복전을 가능케 하였지만 이러한 제국에 대한 공유관념은 도리어 제국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군주권이 강화되었으나 그것이 대칸의 자리는 칭기스칸의 후손이라면 누구라도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계승관념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러한 독특한 몽골족의 계승 방식은 몽골제국이 중앙아시아에 등장하여 중국에 대한 지배권을 잃고 쇠락하기 100년여 동안 끊임없이 등장하였다.
발표를 준비하면서 한때에는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제국을 영위하였던 몽골족이 왜 그토록 수많은 계승분쟁을 일으키며 짧은 기간에 몰락의 길을 밟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러한 의문 속에서 몽골제국의 국가 지배가 베버의 지배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베버는 지배는 권력의 특정한 형태로서 지배를 전통적 지배, 합리적 지배 그리고 카리스마 적 지배로 세분하였다. 이런 지배의 법칙을 몽골제국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칭키스칸이라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최고의 군사력의 형성으로 수많은 정복전을 거쳐 세계 대제국을 건설하였지만, 칭키스칸의 死後에는 그러한 카리스마의 상실로 제국내의 계승분쟁과 내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즉, 카리스마에 의한 지배는 당시 흩어져있던 몽골족을 통합하고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인 지배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후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다시 급격하게 무너져버리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 후 등장하는 쿠빌라이라는 대칸에 의해 제국의 경영을 효과적으로 해가려고 노력하지만 그의 사후에는 오히려 카리스마의 부재의 결과로 나타 난 더 큰 내란과 계승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것이 곧 몽골 제국의 쇠락의 길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법칙의 적용이 조금은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몽골제국의 형성이 칭키스칸이라는 뛰어난 지도자의 등장으로 이루어졌지만 그의 사후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분쟁을 보면서 베버의 지배법칙을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참고서적》
金浩東, 『몽골제국과 고려』,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룩 콴텐, 『유목민족제국사』, 民音社, 1984.
르네 구르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1998.
서병국, 『거란제국사연구』, 한국학술정보, 2006
申採湜, 『東洋史槪論』, 三英社, 2007.
서울大學校東洋史學硏究室, 『강좌중국사』, 지식산업사, 1990.
스기야마 마사야키, 『몽골 세계제국』, 신서원, 2004.
《논문》
김장구, 「쿠빌라이칸 政權과 몽골帝國의 發展 帝國의 地域的 分割統治의 觀點에서」,『東國史學』第41輯, 東國史學會, 2005.
鄭求先, 「高麗末 奇皇后 一族의 得勢와 沒落,『東國史學』第40輯, 동국사학회, 2004.
윤은숙, 「몽골제국 초기 帝位 계승 분쟁」,『몽골학』23, 한국몽골학회, 2007.
――――, 「옷치긴가 타가차르의 활동과 쿠빌라이의 카안위 쟁탈전」, 『몽골학』22, 한국몽골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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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9.04
  • 저작시기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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