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분묘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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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대별분묘의 구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청동기시대
1) 지석묘
2) 석관묘
3) 송국리 단계의 묘제 및 구획묘
Ⅱ. 초기철기시대
1) 지석묘와 석곽묘
2) 목관묘
3) 옹관묘
Ⅲ. 원삼국시대
1. 낙랑
2. 중부 및 서남부지역
1) 주구묘
2) 적석분구묘
3. 동남부지역
1) 토광목관묘
2) 토광목곽묘
3) 옹관묘
Ⅳ. 삼국시대
1. 고구려
1) 적석총
2) 봉토석실분과 벽화분
2. 백제
3. 신라
4. 가야
1) 목곽묘
2) 석곽묘
3) 횡혈식 석실
Ⅴ. 통일신라와 발해
1. 통일신라
2. 발해

본문내용

6m, 높이 7m까지로 적석목곽분보다 축소되었다. 서악리석실분, 황성동고분, 용강동고분, 장산토우총에서 확인되는 호석은 평지 고분에서는 봉토의 기저부 전면에 돌리고, 산지 고분에서는 봉토 전면에 쌓았다. 호석은 대개 할석인데, 용강동고분은 외호석을 지대석과 면석, 갑석을 갖춘 건축기단식으로 쌓았다.
석실은 모두 지상에 설치되었는데, 평지 석실분은 지표면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산지 석실분은 경사면을 파내고 정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남향으로 봉분의 중앙부에 축조되고 있다. 바닥은 대부분 점토 또는 자갈을 깔거나 회로 다지는데, 원지반토를 사용하거나 자갈을 깔고 점토로 다진 뒤 다시 회를 바르기도 한다. 석실의 평면 형태는 방형과 장방형이 있다. 크기는 장방형의 경우 2.47x1.35의 보문리부부총 부묘가 가장 작고 6.12x3.61의 냉수리석실분이 가장 크며, 방형 석실은 1변의 길이가 최소 2~3.2m이다. 시기가 내려오면서 석실의 규모가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석실벽은 대부분 크기나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할석으로 쌓아 단과 열이 일정하지 않으나, 시기가 내려오면서 비교적 고른 할석을 이용하여 단과 열을 맞추어 쌓는 경향이 보이며, 장방형 석실은 하단부에서부터 조금씩 안으로 들여쌓고 있으나, 방형 석실은 대개 선문의 미석 높이까지는 수직에 가깝게 쌓다가 차츰 안으로 좁혀 쌓고 있다. 천정은 장방형 석실의 경우 수매의 판상석으로 된 평천정이나, 방형 석실은 1~2매의 판상석으로 된 궁륭형이다.
시상은 대부분 할석을 이용하여 장방형으로 쌓고 상면에 자갈을 깔거나 상면과 측면에 회를 발랐다. 장축방향은 동서와 남북이 있는데 동서방향이 우세하며, 시상 위에는 석침이나 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시신을 무관안치 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문리부부총과 냉수리석실분에서는 목관의 흔적이 보인다.
선도는 중앙선도와 좌(동)편선도, 우(서)편선도로 나뉜다. 시기적인 차이는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통일기 무렵부터는 중앙선도로 통일되어 간다. 선도의 형태는 선문부에 비도가 없는 1단선도와 비도가 있는 2단선도로 구분된다. 2단선도는 통일 이후에 나타나는데, 선도의 길이는 시기가 내려오면서 길어진다. 선도의 폐쇄는 주로 할석이나 천석을 내부에 쌓아서 막으며, 선문을 할석으로 쌓아 막은 것, 판상석으로 막은 것, 가공한 판석비를 달은 것이 있다. 충효리10호분과 장산토우총의 경우 좌우로 낮게 할석벽을 쌓았던 것으로 보이며 황성동고분에서는 토층상으로 봉토와 묘도의 절개 부분이 확인되었다.
한편 횡혈식석실분은 구조상 합장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조사된 합장된 고분은 10여기에 이른다. 2인 합장으로 보이는 고분으로는 동천리와총, 충효리257호분, 쌍상총, 傳신덕왕릉 등이며, 후에 시상을 보축하여 3인 합장한 것으로는 서악리석침총, 서악리석실분이 있고, 4인을 합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으로는 장산토우총이 있다. 또한 충효리3호분과 냉수리고분, 방내리고분 등에서도 2인 이상의 합장의 증거가 보인다. 더불어 종래의 1인 매장의 풍습도 상당 기간 합장과 병존하여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향은 대부분 시상의 장축 방향과 석침의 배치 상태를 통하여 추정하고 있다. 방내리고분군의 경우를 제외하고 시상의 장축 방향이 동서 방향의 경우 두향은 동쪽에 두었으며, 남북 방향의 경우는 두향이 남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유행하기 시작한 화장묘는 유해를 화장하여 그 유골을 용기에 넣어 화장하는 매장방식이다. 화장 전용용기로 사용된 골호를 외함에 넣어 매장하는 본격적인 화장묘는 통일기에 들어서 유행한다. 경주 일원에서 화장묘는 민애왕릉 주변과 안압지, 경주시 배동, 조양동, 석장동과 경주시 화곡 1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중 발굴 조사된 화장묘는 민애왕릉 주변과 안압지의 임해전지 기단 아래에서 발견된 장골용기이다. 안압지의 장골용기는 장골 전용이 아닌 단독 용기에 유골을 매납한 7세기대의 초기 화장묘이다. 안에서 개원통보가 발견되어 동전의 주조연대와 임해전지 축조연대, 신라시대 장골용기와의 유사점 등을 감안하여 7세기 중반 이전의 신라시대 화장묘로 보는 견해와 7세기 후반 이후의 통일 초기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한편 동천리고분군과 인접한 지역에서 횡혈식석실분과 함께 같은 봉토 내에서 골호가 독립된 소형 석곽 안에 안치되어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화장묘와 석실분은 동일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데 횡혈식석실분의 구조나 출토 토기로 보아 동천리와총보다는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고 있어 6세기 후반경의 신라 초기 화장묘로 추정하고 있다.
2. 발해
발해의 고분은 전체적으로 대략 130개 정도의 고분군에서 4천기 이상을 확인하였고, 700~800기 정도가 발굴된 것으로 추산되지만, 제대로 보고된 것은 많지 않다. 발해 고분은 축조 재료에 따라 토광묘, 석축묘, 전축묘로 대별된다. 석축묘에는 석실묘, 석곽묘, 석관묘가 모두 포함된다. 토광묘-석축묘-전축묘 순서로 출현 시기가 빠르며, 묘제 면에서 볼 때에 토광묘는 말갈, 석축묘는 고구려, 전축묘는 당나라의 전통을 반영한다. 아울러 석실묘와 석곽묘가 중심을 이루고 토광묘와 전축묘가 극히 적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전통이 지배적이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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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2.05
  • 저작시기20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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