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의 기원과 고대이집트의 수식 및 두발양식에 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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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용의 기원과 고대이집트의 수식 및 두발양식에 관한 설명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미용의 기원을 설명
2. 한국미용의 역사
3. 고대이집트의 수식 및 두발양식에 관한 설명
참고문헌

본문내용

성들은 우유, 포도주, 과일 등으로 마사지를 했으며 손톱을 치장 하고 볼과 입술은 붉게 표현했다.
4) 중국
당나라 때에는 외양의 화려함이 동양문명의 최고점에 달했던 시대라고 일컬어진다. 이 시대의 생활풍습과 문화의 영향이 우리나라에도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전래되어 머리를 높이 치켜올리는 것과 가닥가닥 땋아서 늘어뜨리는 형태가 있었다. 장신구로는 당나라 때부터 화관 을 주로 머리를 남녀 모두가 사용하였다. '동경몽화록'에 의하면 공주가 출가할 때 궁녀 수십 명이 모두 머리에 진주 비녀를 꽂고 영롱한 비단 꽃을 달았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몽양록] 중에도 '새가 날고 봉황이 노니는 칠보비취를 하고 머리는 꽃송이를 한 것'과 같은 종류의 머리장식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송나라 때의 여자들은 주로 두 갈래로 묶어서 끝을 말아 올려 리본이나 꽃으로 장식하여 묶었으며 화려한 화관 을 사용하였다. 하류계층인 노동하는 부녀들은 일반적으로 수건 으로 머리를 싸매었을 뿐 어떠한 머리장식도 하지 않았다. 청나라 초의 만주족과 한족여자는 각 민족의 전통적 제도를 지켜왔는데 만주족의 여자는 두갈래로 나눈 머리와, 한녀는 모단두(비단으로 장식한 머리), 하화두(꽃을 꽃은 머리) 등을 하였다. 남자들의 머리형태는 연령에 따라서 다르게 하였는데 앞이마를 넓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깨끗이 후론트 부분의 머리를 밀고, 탑 부분에 남은 머리카락은 뒤로 묶어 땋아서 댕기를 들였다. 이는 유목민의 후예로서 말을 타는데 머리카락이 흩날리지 않게 간편하게 땋는데서 오는 풍습이라고 볼 수 있다. 넓은 대국이라는 견지에서 이마가 넓으면 마음이 유(有) 하다는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풍습에는 두발에 즐겨 꽃을 꽂았다. 홍융화 는 겨울철, 그것도 명절 때에 사용하였으며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 은 봄, 여름, 가을의 천연적인 장식품이었다. 북방의 성년 부녀자는 항상 계위에 은비녀를 꽂았고, 남방의 성년 부녀자는 즐겨 나무 빗치개를 횡으로 꽂았다. 평상시에는 모자를 쓰지 않았고 북방의 날이 추울 때 소군투 를 입었으며 남방에서는 대부분 두륵 을 썼으며, 또 검은 융위 에 주삽수화를 수놓아 대나무에 감싼 뇌고 라고 하는 머리장신구를 만들어서 비녀처럼 머리 뒤쪽에 매었다.
참고문헌
곽형심외 8명, 정문각, 미용학개론, 1999.
김계순외 8명, 훈민사, 미용학개론, 2001.
장선일외 11명, 광문각, 미용학개론, 2005.
뷰티예술학부 : 안영희 교수

키워드

미용,   미용
  • 가격2,0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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