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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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아시아근대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는 절도가 있었다. 시행 가능한 것은 받아들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무리 요구해도 반드시 거절했다.
혁흔의 이러한 외교 원칙은 같은 시기 외교를 담당했던 이홍장(李鴻章)과 비교할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홍장은 서방 열강과의 외교에서 별다른 식견이나 책략 없이 그저 \'성실\'하게 상대하면 된다고 우기다가 결국은 교활하고 무도한 침략자들에게 엄청난 배상금과 땅을 떼어주었다. 게다가 그 자신은 만고에 씻지 못할 죄인이 되었다.
양무운동의 주창자이자 주동자로서 혁흔은 탁월한 식견의 모략사상을 많이 제기했다. 그는 양무가 시작된 이상 서양인을 배워야 하며 특히 군사 방면에서는 \'서양인들의 장점을 모조리 다 배우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 서양인들의 침략 의도를 막아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이를테면 신식 교육을 위해 초빙된 서양 교관들이 내정에 간섭하는 일 따위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에게는 가르치는 책임만 부여하고 병권은 철저하게 중국 장수에게 귀속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혁흔은 또 상해에서 조직된 서양 총기부대가 \'도적을 소탕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보다 앞서 있는 서양의 무기 제조술 등을 몰래 배우는 방안을 제기하기도 했다. 교련이란 명목으로 그 방법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상해 등지에서는 서양식 무기 제조술을 배우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혁흔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련 관원들에게 정해진 시기 내에 그 비밀을 모조리 다 훔쳐 배우도록 했다.
양무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혁흔은 점차 서양의 선진 생산기술과 군사장비가 다름 아닌 선진 과학문화의 기초 위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즉 그들의 기술이 모두 천문이나 수학 등 기초과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근본적으로 착실하게 공부하지 않고 겉만 배워서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외국의 과학문화를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외국어와 문자를 배워야 한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이를 위해 혁흔은 직접 주도하여 번역 인재들을 기르는 신식학교인 동문관(同文館)을 창설했다. 이는 사실상 중국 근대교육의 첫출발이었고, 이어서 유학생들을 계속 외국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중국 근대교육의 개창자로서 혁흔의 모습을 이러한 활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서양의 장점을 끝까지 다 배우고\' \'그 바닥(기초)을 모조리 배워야 한다\'는 혁흔의 사상은 실제로는 중국의 역사학자 위원(魏源, 1794∼1856년)이 제기한 \'오랑캐의 장기를 스승으로 삼아 오랑캐를 제압하자\'는 사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혁흔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 예를 들어 그의 동생인 혁현은 혁흔의 정치적 재능을 \'명쾌(明快)\'라는 압축된 단어로 표현했다. 오늘날 표현을 빌자면, 임기응변에 능숙하면서 큰 일을 과감하게 처리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모략가로서 혁흔의 행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평가는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다.
<출처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차이위치우 외 지음 | 김영수 편역, 2005.10.20, 들녘>
  • 가격4,2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3.06.30
  • 저작시기2013.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54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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