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장관 유형][장관 역할][장관 정책능력][회의][리더십][남북회담]장관의 유형, 장관의 역할, 장관의 정책능력, 장관의 회의, 장관의 리더십(리더쉽), 장관의 연구, 장관의 남북회담, 장관 관련 제언 분석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장관][장관 유형][장관 역할][장관 정책능력][회의][리더십][남북회담]장관의 유형, 장관의 역할, 장관의 정책능력, 장관의 회의, 장관의 리더십(리더쉽), 장관의 연구, 장관의 남북회담, 장관 관련 제언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장관의 유형
1. 관리자형
2. 전문가형
3. 정치가형

Ⅲ. 장관의 역할

Ⅳ. 장관의 정책능력

Ⅴ. 장관의 회의

Ⅵ. 장관의 리더십(리더쉽)

Ⅶ. 장관의 연구

Ⅷ. 장관의 남북회담

Ⅸ. 결론 및 제언

참고문헌

본문내용

어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일곱째, 쌍방이 2차 회담을 11월중에 북측지역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남북군사당국간 대화가 사실상 정례화 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다.
반면, 그러나 구체적인 합의 사항에 나타나 있듯이 북측이 주장하는 경의선 복원 공사에 따른 협조문제만 논의 합의되었을 뿐, 우리측에서 제기한 구체적인 신뢰구축방안은 공동보도문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북측에 유리한 쪽으로 합의된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제기되었다. 즉, 군 수뇌간의 직통 전화설치, 군사훈련의 상호통보 및 참관단 교환과 같은 실질적인 군사적 긴장완화 방안에 대해서는 진전이 전혀 없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이는 첫 회담에 거는 기대가 너무 컸던 요인도 있지만, 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의도적인 입장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북한은 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남북한 군사적 긴장 완화와 전쟁 위험 제거를 내용으로 한 공동보도문 2항의 관철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러한 북한측의 입장과 의도는 회담을 진행하면서 더욱 명확해 졌는데, 북한측이 무엇을 원하고 있고 회담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보다 뚜렷해지고 있다. 북한측의 의도와 회담을 통해 얻으려는 목적은 11월 28일과 12월 5일에 개최된 제1, 2차 남북군사실무회담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Ⅸ. 결론 및 제언
1963년 12월 12일 출범하여 1972년 12월 유신정부가 출범하기 직전까지 10년간의 기간동안 총 31차례의 장관교체(개각)가 있었다. 개각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한 두 명의 장관교체가 주종을 이루는 소폭개각에 해당된다. 국무총리의 교체에 관련된 개각과 5개 부처 이상의 대폭개각에 해당하는 개각은 제3공화국 기간동안 6차례 있었다. 이 가운데 국무총리의 교체에 따른 개각이 3차례 있었으며(1964. 5.11; 1970. 12.19; 1971. 6.3), 국무총리의 교체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대폭개각이 3차례 있었다(1967. 10.3; 1968. 5.22; 1969. 10.21). 이와 같이 여러 장관을 동시에 교체하는 개각은 장관개인의 특정한 귀책사유보다는 주로 경제정책의 방향전환이나 정치적인 국면의 타개를 위해 이루어졌다. 경제정책의 방향전환과 관련한 개각은 5개 경제부처 장관을 동시에 교체한 1967년 10월 3일의 개각을 들 수 있다. 국무총리의 교체에 따른 3차례의 내각 개편은 주로 정치적인 국면의 타개를 위한 것이며 국무총리 교체와 관계없이 6개 부처 장관을 교체한 1969년 10월 21일 개각도 3선 개헌후의 정치적 대응을 위한 개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25차례에 걸쳐 한 두 명의 장관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개각(장관교체)에는 보다 다양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한 두 명의 장관을 대상으로 25차례에 걸쳐 단행한 장관교체(개각)의 이유를 범주화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 업무에 관련한 지휘책임 등을 묻는 문책성 장관교체이다. 이러한 범주에 해당하는 장관교체가 9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특기할 것은 9차례 가운데 4차례가 국방부장관에 대한 인책이라는 점이다(1968. 7.28; 1968. 8.5; 1970. 3.11; 1971. 8.24). 1968년의 1.21 사태, 1971년 8월의 실미도 사건 등 군과 관련된 사건들이 자주 발생함에 따라 국방부장관에 대한 인책성 교체가 4차례나 단행되었던 것이다. 이 밖에 서울대 등 학생데모의 격렬화에 관련한 문교부장관의 교체(1965. 8.27), 재벌밀수사건의 처리와 관련된 재무부장관과 법무부장관의 교체(1966. 9.26), KAL기 납북미수 사건과 관련한 교통부장관의 교체(1971. 1.28), 전반적인 국토건설행정의 난맥상과 관련한 건설부 장관, 쌀값 문제 등 양곡정책의 무계획성과 관련한 농림부장관의 교체(1969. 2.15)가 문책성 사유의 장관교체에 해당된다.
둘째, 건강문제 등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한 사의표명에 따른 장관교체이다. 이러한 범주에 해당하는 장관교체가 4차례 이루어졌다. 체신부 장관 김홍식, 재무부 장관 홍승희, 교통부 장관 장성환, 경제기획원 장관 김학렬 씨 등이 건강문제 등으로 사의를 표명하여 장관을 교체하게 되었다(1965. 5.15; 1966. 1.24; 1971. 11.23; 1972. 1.4).
셋째, 각료들간의 갈등으로 인한 사의표명에 따른 장관교체이다. 이는 제3공화국 기간동안에만 발견되는 특이한 현상으로 당시 박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던 장기영 경제기획원장관과의 갈등으로 사의를 표명함으로써 3차례나 장관교체가 일어났다. 재정금융정책을 둘러싼 재무부 장관과의 갈등으로 2차례에 걸쳐 재무부장관이 교체되었으며(1964. 6.27; 1964. 12. 5), 언론사에 대한 대응조치를 둘러싼 갈등으로 공보부 장관이 사의를 표명하여 장관이 교체되었던 것이다(1964. 9.8).
넷째, 국회의원 출마와 국회에서의 해임결의안 가결로 인한 장관교체이다.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사의를 표명함으로써 이루어진 장관교체가 2차례 있었으며(1966. 4. 4; 1966. 12.27), 국회에서의 장관 해임결의안이 가결됨에 따라 해당 장관을 교체하는 사례가 2차례 발생하였다(1969. 4.11; 1971. 10.7).
끝으로 위에서 언급한 범주에 들지 않는 기타의 사유로 장관의 교체가 5차례 있었다. 예컨대 제3공화국 출범당시에 국무총리가 겸직하던 외무부 장관을 새로 임명한 경우(1964. 7.25)와 장관의 교체는 아니지만 신설부처인 과학기술처 장관의 새로운 임명(1967. 4.12) 등 이 기타의 범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김호균, 임명권자의 임명기준을 토대로 본 장관의 역할 고찰, 한국행정연구원, 2002
류은상, 장관회의 운영방식 비교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2006
안병영, 한국 장관의 역할, 유형, 그리고 정책영향력, 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3
이시원 외 1명, 역대정부 장관의 교체사유 분석, 서울행정학회, 2010
정광호, 한국장관의 리더십에 관한 연구, 국민대학교사회과학연구소, 2004
편집부, 남북 국방장관회담 합의서 전문, 북한연구소, 2008

키워드

  • 가격6,5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13.08.08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7026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