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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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짧은 여행의 시작. (page 2~3)
- 답사의 시작과 창덕궁에 대한 사전조사.

II. 수문장 교대식. (page 3~4)
- 창덕궁 도착과 돈화문 앞의 수문장 교대식.

III. 본격적인 궁궐 답사의 시작. (page 5~11 )
- (1)돈화문과 인정전.
- (2)용의 침실 대조전.
- (3)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부용지와 부용정)
- (4)불로문과 연경당.
- (5)조선 왕가의 마지막 안식처 낙선재.

IV. 에필로그 (page 11 )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살았던 우리의 마지막 궁궐.

본문내용

상들의 슬기로움을 동시에 느껴 볼 수가 있다. 먼저 연경당의 입구는 남녀가 다른 문을 사용하도록 되어있는데, 들어가는 쪽에서 바라볼 때 왼쪽이 여자를 위한 문, 그리고 오른쪽이 남자를 위한 문이다. 여자를 위한 문에 비해 남자가 통행하는 문은 너비도 약간 넓거니와 자세히 보면 높이 또한 담장을 약간 웃돌도록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안채로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이다. 얕은 담으로써 나마 구분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녀유별만을 내세워 실용성을 아주 무시해 버린 구조 또한 아니다. 특히 안주인이 머무는 안채와 남편이 머무는 사랑채는 서로 별개의 건물이 아닌 하나의 건물로써 서로 왕래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또 재미있는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담 사이에 뚫려있는
작은 문인데, 용도가 이채롭다.
사랑채에 손님이 들었을 경우, 입구까지 나가서 다시 사랑채로 가거나, 직접 사랑채의 손님들이 몇 명 있는지 확인 하지 않아도, 작은 문을 통해 사랑채 앞에 놓인 신의 개수를 세어보고 그에 알맞은 접대 준비를 했었다고 하니, 얼마나 실용적인 배려인가.
사랑채와 서재로 쓰이던 선향제의 구조는 옛 건축가들의 세심한 배려와 지혜를 느낄 수 있을 만한 여러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몇 가지가 있다.
그것은 한 여름에 문을 아예 들새를 고정시켜서 개방한 상태로 둘 수 있는 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 문이라 함은 미닫이, 혹은 여닫이만을 생각해 왔는데, 연경당의 문은 잡아당겨서 위로 올릴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또한 선향제의 지붕은 서고의 책들을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보존하기 위해서 이중의 지붕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방에 달려있는 문과 달리 바깥쪽에 하나의 문이 더 있어서 오늘날의 차양과 같은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흥미로웠던 연경당의 모습을 뒤로하고 다시 다음 장소로 향했다.
(5)조선 왕가의 마지막 안식처 낙선재.
공개 된 후원을 모두 둘러보고 다시 바깥쪽으로 나가면서도 못내 아쉬움이 남았던 것은, 바로 시원한 나무그늘 이었다. 후원의 나무들은 그곳을 빠져나오는 길에도 울창한 나무그늘로 우리를 시원하게 배웅해 주어서, 다시 뜨거운 햇볕으로 가야만 하는 일행은 아쉬움을 잠시 접어 두어야만 했다.
낙선재로 가는 도중 오른쪽에 보였던 건물이, 내의원으로 쓰였던 성정각이었다. 본디 성정각은 세자가 학자들과 유교 경전을 공부하던 곳이었으나, 왕의 가장 가까이에 내의원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곳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의원은 궁중의료기관으로 왕과 왕족의 병을 치료하고 약을 조제하던 곳으로 내국이라고도 불렸으며 의녀도 있어서, 이들은 남자의관에게 진찰받기 어려운 궁중 여성들의 치료를 담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내의원 담벼락에는 짤막한 매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매화나무를 안내원은 자세히 보아 달라고 했다. 저 자그만 나무가 무에 볼 것 있다고 그럴까 싶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 또한 사연이 있었다. 작은 나무지만 자그마치 300년 이상의 수령을 가지고 있고 청에서 사신이 선물로서 보내온 것이란다. 역시 사물은 것만 보고는 판단할 일이 아니다.
얕은 나지막 길을 따라와서 끝자락에 편안하게 보이는 건물이 낙선재였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에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은 집으로. 그 뒤로, 마지막 황후인 순정 효황후 윤씨,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고종황제의 외동딸이자 마지막 공주였던 덕혜옹주, 일본의 왕녀로 두 나라를 조국으로 섬겨야했던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 등 비운의 주인공들이 한 많은 삶을 이곳에서 마쳤다. 가장 최근까지 실제 왕가의 사람들이 살았던 낙선재는 1989년 이방자여사와 덕혜옹주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빈 집이 되었다고 한다.
낙선재 옆으로 석복헌, 수강재가 나란히 붙어있는데, 보통은 이들을 모두 통틀어 낙선재라고 한다. 원래는 창경궁 영역에 속하는 건물이었다. 낙선재의 대문은 연경당 대문과 같은 이름인 장락문인데 현판의 글씨는 대원군이 썼다고 한다. 장락문의 뜻은 오래도록 즐겁게 살라는 뜻으로, 후궁들과 궁중의 여인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로 보인다.
사진에 보이는 계단은 언덕을 층층이 깎아 돌로 가장자리를 마무리하고 단마다 꽃을 심은, 글자 그대로 '꽃계단'이다. 한국 전통 정원에는 화계가 많다고 하는데. 한국은 산과 언덕이 많은데다가,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보통은 산을 등지고 집을 짓게 된다. 따라서 집 뒤엔 비탈진 곳이 으레 있기 마련이고, 이를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화계를 쓴다고 한다. 창덕궁에는 경훈각과 연경당, 낙선재에 화계가 있다.
낙선재의 문지방들은 각각 모양이 같은 것이 거의 없었는데, 모양이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또한 독특한 창살들은 다른 건물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고 한다.
IV. 에필로그
낙선재를 나와서 일정의 마지막 코스인 어차고와 금호문으로 향했다.
어차고에는 왕과 왕비가 사용했던 가마와 자동차가 있었다. 어차고에 전시 되어있던 것 중에는 왕의 휴대용 휴게실도 있었는데, 부피와 무게가 꽤 많이 나갈 것 같았다.
설명에 의하면 작은 단위로 분리되어 운반되다가 왕이 휴식을 취할 때는 다시 조립을 해서 썼다고 한다.
금호문을 빠져 나온 곳은 다시 주차장과 매표소 부근 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의 궁궐 답사를 모두 마친 일행은, 그 동안 아름다운 궁궐을 보느라 느끼지 못했던 피로감을 한번에 느끼고 있어서,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날씨 좋은 날, 이렇듯 아름답고 뜻 깊은 궁궐 나들이를 해보는 것도, 평이한 일상에 활력을 줄 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 살았고, 마지막 왕족들이 살았던, 창덕궁.
녹음이 펼쳐진 5월의 궁궐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비어있는 궁궐이 아니라, 마치 여러 궁인들이 드나들고, 왕을 알현하려는 신하들이 드나들고, 왕이 호령하는 소리가 들릴 법하게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가을이나 겨울에 와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까. 후원의 꽃과 나무들, 그리고 이름모를 새들은, 생명력이 충만한 5월에 궁궐 전체를 살아있게 해주고 있었다.

키워드

창덕궁,   궁궐,   답사,   기행
  • 가격1,3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06.14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5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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