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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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창경궁 답사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창경궁의 창건 배경
2. 창경궁의 변천사
3. 창경궁의 궁제와 배치
4. 교수님과의 답사
창경궁의 건물들
1) 홍화문
2) 옥천교
3) 명전문
4) 명전전
5) 문정전
6) 숭문당
7) 빈양문
8) 함인정
9) 환경전
10) 경춘전
11) 통명전
12) 양화당
13) 영춘헌과 집복헌
14) 자경전터
15) 풍기대와 해시계
16) 성종태실비
17) 춘당지
18) 관천대

Ⅲ. 결론

본문내용

는 길목 왼쪽으로 좁은 길이 하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성종태실비가 있다. 궁궐에 왠 태실?이라는 어색함은 창경원 시절이 남겨놓은 흔적이기 때문이다. 국왕의 태실로는 드물게 경기도 지방에 있던 성종 태실비가 이왕직(李王職)의 손을 거쳐 이곳 창경원으로 옮겨졌는데, 그때가 바로 1928년이었다. 국왕의 태실이, 그것도 하필이면 '성종대왕'의 태실이 창경원으로 옮겨진 것은 그것이 가장 상태가 좋다 하여 태실의 표본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더 이상 태실이 아니라 그저 박물관의 야외진열품이었던 것이다.
17) 춘당지
춘당지는 1909년 창경궁을 유원지로 만드는 과정에 조성되었다. 두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곳은 원래 위의 연못이 춘당지이고 아래 연못은 권농장라고 하여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보면서 농정을 살피기 위한 곳이었다. 궁궐의 후원 깊숙한 곳에 이처럼 논을 만들 어 놓고 왕이 직접 농정을 살폈다는 것은 조선왕조가 국가경제의 근간을 농업 생산력에 두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같이 권농장이 사라지고 두 개의 연못으로 된 것은 일제시대의 일이고, 더 화가 나는 것은 이 위에서 보트를 타고 노는 유원지처럼 왜곡되어 쓰여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쪽의 식물원자리는 춘당대라고 하여 과거시험장으로 관리를 등용하는 곳이었다.
지금도 창경궁 내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봄이면 사생대회를 온 학생들이, 또 연인이나 가족들이 연못가에 자리를 잡고 쉬 어가는 창경궁내의 휴식공간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처럼 춘당지는 연못, 논, 과거시험장의 3가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18) 관천대
관천대는 숙종 14년(1688)에 조성된 것으로, 본래는 창덕궁 금마문 밖에 있었던 것을 일제시대에 현재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현재 관천대의 자리는 원래 관서공간 이었다. 관천대란 17세기 최대의 천체 관측기구로 현재 보물 851호로 지정되어있다.
Ⅲ. 결론
같은 것도 어떤 의도로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큰 차이를 지니는 것 같다. 궁궐이라는 곳이 소풍의 개념으로 갈 수 있고 학습을 위해 갈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소풍이든 답사든지 같은 두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소풍을 다녀온 뒤에 일제의 무참한 행동에 분노를 느끼게 될까? 아니면 과거에 대한 나의 무지에 화가 날까? 그것도 아니면 정조의 효심을 알 수 있을까? 재미있게 본 장희빈이라는 드라마의 배경이 이 곳이었는지 등을 알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번 답사를 통해서 많은 것들을 배운 것 같다. 이는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이나 건물의 구조같이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제대로 파악해야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지만 내게 의미 있게 남은 것은 우리의 정신이 깨어져야 한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특히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인 한 국가의 궁궐이 대한민국이 되고 나서도 국민의 역사의식, 문화의식이 부족하고 경제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제가 만들어 놓은 창경원으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는 너무 부끄러웠고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었다. 그러나 더 화가 나는 것은 나 또한 특별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그나마 많이 고쳐져서 보존되어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아있는 일제시대의 잔재는 처리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남는다. 언제 반입된 것이지도 모르는 명전전 뒤편의 오층석탑, 중국에서 건너온 팔각칠층석탑 등을 보며 현재의 우리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는 광해군이 복원할 당시, 항상 과거·현재·미래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생각했듯이 우리도 보이는 것이든 안 보이는 것이든 그 의미를 찾아내어 우리가 진정 지켜야 하는 것들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민족, 나라의식을 잊지 말고 파괴된 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궁궐이라는 곳은 한나라의 아버지 어머니가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대단한 곳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화려함의 이면에는 많은 시련으로 인한 아픔이 있었고, 말할 수 없는 어쩌면 지금도 모르고 지나갔을 많은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그런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 또한 갑자기 애국자가 되어 버린 듯한 생각이 드는데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되지 않도록 역사의식을 길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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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19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6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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