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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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자치운동의 배경
1) 자력독립불능론(自力獨立不能論)
2) 민족자본가 상층과 민족주의 우파의 동요심화
3) 총독부의 민족운동 분열정책
4) 세계 약소민족운동의 영향

3. 자치운동의 전개과정
1) 제 1차 자치운동 (1923~24년)
2) 제 2차 자치운동 (1925~27년)
3) 제 3차 자치운동 (1929~32년)

4. 지방자치

5. 자치운동의 성격

6.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당국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진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인들의 자치운동과 총독부측의 연관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이 운동의 성격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한편 자치운동은 민족개량주의 운동이면서 동시에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의 일환으로서 나타난 ‘관제운동(官制運動)’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총독부와 그 주변의 식민주의자들은 민족자본 최상층과 일부 민족개량주의자들을 사실상 총독부 권력하에 종속시키면서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자치운동을 전개하도록 함으로써 민족운동을 약화, 분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하의 자치운동은 관제운동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상에서 살핀바와 같이 자치운동론은 한편에서는 1910년 이후 신지식층들의 실력양성운동론의 논리적 귀결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그 실력양성론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의 타협에 매몰되는 모습을 띠고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에 이용당하면서 민족운동전선을 분열시키는 역할만 하고 말았다. 따라서 부르주아 민족주의 우파의 개량주의적 운동에 타협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가미된 자치운동은 결코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1단계’가 될 수 없었다.
타협주의적인 민족주의 우파가 추진한 자치운동의 위와 같은 성격은 당시 비타협적인 입장에서 자치론에 반대하고 있었던 민족주의 좌파의 입장과 비교해 볼 때 보다 뚜렷이 드러난다. 타협적인 부르주아 민족주의 우파의 입장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것은 물론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이었으나, 여기에서는 그들과 어느 정도 가까우면서도 또 크게 대비되고 있던 민족주의 좌파의 입장을 비교함으로써 자치론자의 입장을 보다 분명히 밝혀보기로 한다. 박찬승,『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 역사비평사, 제 4장, 364쪽.
안재홍 등 민족주의 좌파는 자치운동은 ‘회색의 기회주의자들이 제창하고 있는 공리적 타협론’ 으로서, ‘해방 전선에 적지 않은 혼란 상태를 야기’ 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것이라고 격렬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는 정치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문화상으로나 어떠한 방면을 물론하고 완전한 해방을 기도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라 할진대 우리의 나아갈 길도 다만 우리의 굳센 신념과 또 간단(間斷)없는 노력뿐인가 한다.’라 하여, 민족운동의 유일한 목표는 완전한 해방이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굳센 신념과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민족주의 좌파가 구상하는 민족운동의 방법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민족좌익전선’ 을 결성하고, 이를 중심으로 대중에 기반을 둔 정치투쟁을 전개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 인식 위에서 신간회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또한 민족주의 좌파에서는 민족주의 우파가 겉으로 ‘무조건적인 대동단결’ 을 부르짖으면서 이면으로 자치운동을 기도하고 있었던 것을 ‘음험한 위선’ 이라고 격렬히 비난하고 그것보다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입장 차이를 인정하고 ‘시간적 협동전선’ 을 도모하는 ‘솔직한 공동전선’ 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자치운동을 배격하고 대중에 기반을 둔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을 주장하고 있던 부르주아 민족주의 좌파의 입장을 통하여, 자치운동을 주장하던 부르주아 민족주의 우파의 입장이 어떤 것이었는가는 보다 분명히 확인된다.
6. 맺음말
일제 식민지지배하에서의 자치운동은 이미 3.1운동 전후부터 일부 상층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구상된 바 있었다. 그들은 한국의 독립은 역량상 불가능 하다고 보고 일제하에서 자치권을 획득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구상은 한때 ‘민족자결주의’의 열풍에 밀려 잠시 뒷전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나 1923년경부터 일부 민족개량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되살아나게 된다. 한편, 외교적으로 독립할 가능성이 불가능해지자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다수가 민족개량주의로 빠지면서 실력양성운동에 그 핵심을 둔 이른바 ‘문화운동’ 을 제창하고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자본육성은 정치적 권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한 민족 자본가들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민족자본가 상층은 일제 권력과 밀착하면서 예속자본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고 이들과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부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일제에 타협적인 자치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또 이들의 생각에 자극을 준 것은 약소민족의 독립청원, 자치운동이었다. 그러나 민족자본상층과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모두 자치론으로 전환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 상황을 주시하면서 아직은 ‘경제적, 문화적 실력양성론’ 에 머물러 있었다.
1920년대 중반 국내의 사회주의 운동, 노농운동이 크게 활성화되는 가운데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연합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사태를 한국에 대한 영원한 식민지 지배에서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간주했다. 이에 총독부 측은 사회운동의 기세를 꺾고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해 자치제 실시 문제를 검토하고 이를 일부 민족개량주의자들에게 흘려 그들의 자치운동을 고무시켰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에 걸친 자치 운동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그러나 1930년 만주침략과 함께 한국의 대륙침량 병참기지화 정책이 채택되고 ‘내선일체(內鮮一體)’가 강조되는 가운데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에서 자치제 실시와 같은 회유정책은 더 이상 들어설 여지가 없어졌다. 그런 가운데 자치론을 주장하던 민족개량주의자들도 일제의 한국지배정책에 순응하여 더 이상 자치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일제의 대륙침략과 황국 신민화 정책에 앞장서게 되었다.
※참고문헌
강만길,『한국사 15:민족해방운동의 전개 1』, 한길사, 1995.
노융희,『한국의 지방자치 : 회고와 전망』, 녹원출판사, 1987.
박찬승,『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 역사비평사, 1992.
서중석,『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1, 역사비평사, 1991.
김동명,「일제하 동화형협력 운동의 논리와 전개-최린의 자치운동의 모색과 좌절」,
『한일관계사연구』21, 2004.
박찬승,「일제하 자치운동과 그 성격」,『역사와 현실』2, 1989.
유효종,「일제하 자치운동에 관한 사회학적 고찰」,『연세사회학』3,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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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7.04
  • 저작시기20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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