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배상문제와 한일회담의 역사적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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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배상문제와 한일회담의 역사적 재조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한일회담 전 한일 배상문제
(1) 일본 재산의 처리 문제․․․․․․․․․․․․․․․․․․․․․․․․․․․․․․․․․․․․․․․․․․․․․․․․․․․․․․․․․․․․․․․․․ P 1
(2) 이승만 정권의 대일 배상요구 준비․․․․․․․․․․․․․․․․․․․․․․․․․․․․․․․․․․․․․․․․․․․․ P 2

2. 1차 회담
(1) 배경․․․․․․․․․․․․․․․․․․․․․․․․․․․․․․․․․․․․․․․․․․․․․․․․․․․․․․․․․․․․․․․․․․․․․․․․․․․․․․․․․․․․․․․․․․․ P 2
(2) 예비회담․․․․․․․․․․․․․․․․․․․․․․․․․․․․․․․․․․․․․․․․․․․․․․․․․․․․․․․․․․․․․․․․․․․․․․․․․․․․․․․․․․․․․․․ P 2~3
(3) 본 회담․․․․․․․․․․․․․․․․․․․․․․․․․․․․․․․․․․․․․․․․․․․․․․․․․․․․․․․․․․․․․․․․․․․․․․․․․․․․․․․․․․․․․&

본문내용

나게 되었다. 한일회담 추진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김종필의 퇴진은 한일회담의 진전에 제동을 걸게 된 것이다.
정국혼란에 있어서 또 하나의 원인은 군사정권의 민정에 참가하는 문제였다. 박 의장은 혁명 공약이었던 민정이양 후 군사정권이 퇴진할 것이라는 약속을 어기고 군부가 지속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뜻을 보였다. 이에 각 정당뿐만 아니라 군사정권 내의 비 주류세력으로부터 군부의 민정참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군사정권은 이러한 시기에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는 것은 다가올 대통령 선거에서의 승리를 어렵게 하는 것이라 판단하였다.
② 한국 국내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격화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와의 전전 끝에 근소한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어 11월 26일에 행해진 제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75석 중 110석을 획득하여 원내 안정 세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2년 7개월간의 군정을 끝마치고 선거에 의한 정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국회가 구성되고 야당의 정치활동이 활발해졌다는 것은 한일회담의 추진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군사정권시절에는 군정이 대일 정책을 단독으로 결정하고 이를 강행하는 방식으로 회담이 추진되었지만, 국회구성 민정 이관 후에 있어서 정부의 대일 정책은 야당을 비롯한 회담 반대세력의 강력한 저항과 비판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1964년에 접어들어 한일 양국 정부는 회담을 연내에 타결하여 비준을 완료한다는 목표를 정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교섭을 촉진하는 자세를 표명하였다. 1963년 12월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던 오오노 자민당 부총재는 박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한일 회담을 가능한 조기에 타결하기 위한 외상급 정치회담을 개최할 것에 합의를 보았다. 동경에서의 예비절충에서는 교섭의 타결 일정이 다음과 같이 합의 되었다.
a) 1964년 1월 10일 ~ 30일 : 어업문제 집중토의
b) 1964년 2월 ~ 3월 : 청구권, 어업, 법적지위, 문화재, 선박 등의 제 문제와 양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의 문안을 작성
c) 1964년 4월 1일 : 조인 실시
d) 1964년 5월 중 : 조인 완료
그러나 회담의 타결이 임박해짐에 따라 한국에서는 회담 반대운동의 기세가 거세지기 시작하여 한일회담은 개시 이래 최대의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3월 6일 전 야당이 ‘대일 저자세 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대규모로 확대되었으며 점차 그 성격도 박 정권 타도를 표방하는 반정부 시위로 변모해갔다. 6월 3일 서울의 학생시위는 시민들이 가담하는 사태로 발전하여, 결국 63 계엄령 선포에서부터 1964년 말까지의 한일회담은 한국정국의 안정을 기다리는 공백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7. 7차 회담과 한일회담 타결
(1) 배경
① 미국의 존슨 정권은, 베트남 정세의 악화, 중국의 핵실험 성공, 그리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결정 등 긴박하게 전개되는 아시아 정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한일 양국의 정치경제적 결속을 강력하게 추진. 이를 위해 한일 양국에 조속한 타결에의 압력 행사
② 국제냉전의 격화가 일본 자민당 내에도 파급되어 우파의 입지가 강화. 일본 재계는 대규모의 경제협력의 실시를 목전에 두고 한국시장 진출을 위해 조기타결을 더욱 강력하게 촉구. 산토정권은 한일교섭의 타결이 일본을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길 뿐 아니라, 장차 전개될 오키나와 반환을 둘러싼 대미 교섭을 유리하게 끌고 가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 판단
③ 1965년 2월 방한한 시이나 외상은 서울 도착성명에서 “양국 간의 긴 역사 속에서 불행한 시기가 있었던 것은 매우유감이며 깊이 반성한다.”고 언급. 이것은 일본정부가 식민지지배에 관해서 최초로 표명한 사죄의 표명으로, 대대적으로 한국의 매스컴에 보도되어 대일 감정을 연화시킴
(2) 한일회담 타결의 진행 (이동원 외무장관 - 시이나 외상)
① 1965년 2월 20일, 기본조약의 가조인
② 1965년 4월 3일, 기타현안의 일괄타결
③ 1965년 6월 22일, 정식 조인
8. 한일회담에 대한 고찰
한일 양국의 국내 정치경제적 상황과 냉전체제 등의 국제 정세, 미국의 압력 등 복잡한 요소들이 얽혀 이루어진 한일회담의 타결은 결과적으로 그 어느 쪽의 승리라 평가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당시 한일회담은 한일 양국의 문제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보았을 때 그 어떤 결정을 내렸던지 간에 지금과 같이 후세에 많은 비판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협상론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의 협상 진행은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협상에 임하는 태도는 분명히 비판을 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앞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우선 이승만 정권이 진행하였던 1~4차 한일회담에서 한국 정부는 명분만을 내세웠을 뿐 협상을 통해 어떠한 실리를 얻으려 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며, 협상 상대국인 일본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보여 진다. 박정희 정권이 진행하였던 6~7차 한일회담에서의 한국 정부는 실리를 얻으려는 데에 치중한 나머지 명분을 얻지 못했고, 협상에 있어서 시간의 제약을 두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스스로 빠져들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지금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 과거에도 옳을 것이라는 생각은 무의미한 일일 뿐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통해 앞으로의 올바른 길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일회담 또한 같은 범주에서 생각할 수 있다. 비록 현재 한일회담이 각계의 여러 단체를 통해 재조명 되고 있지만, 과거의 조약을 소급하여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분명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과거의 반성은 반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해답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9. 참고문헌
▶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 1996년, 서울대학교 출판부, 이원덕
▶ 한일 관계사 연구, 2004년, 도서출판 소화, 지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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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3.15
  • 저작시기20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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