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토시대] 일본의 야마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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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야마토시대] 일본의 야마토시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야마토시대 개관

2. 야마토시대의 문화

3. 최초의 통일국가 성립

4. 왜왕과 송과의 교류

5. 불교의 전래와 숭불, 배불항쟁

6. 고대 왕국 대화(大和)의 붕괴

7. 야마토 국가와 중국

8. 맺음말

9. 참고자료

본문내용

일단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통치계급 전체의 이익이 되며 이 계급을 하나의 안정된 문민 貴族階級으로 변환시키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7세기의 전통적인 야마토 국가의 권력구조의 붕괴는 군주일족 자신들뿐 아니라 우지의 수장들에게도 커다란 걱정스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지의 수장들도 더욱 강력한 중앙권력의 출현과 지방행정과 토지통제의 더욱 효과적인 신기술의 채용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더욱이 호족은 타이카 改新으로 인해 세습권력과 富를 모두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 이전의 수장들은 특권적 지위가 인정되고 중앙정부에 참여할 기회도 주어졌던 것이다. 요컨대 새로운 政體란 우지의 수장들과 그들의 권력과 부의 원천 사이에 중앙집권국가의 공적 제도가 삽입된 것에 불과하였다. 지금까지는 호족의 지체와 권위란 것이 지역적 명성에 대한 또, 개별적 군사력의 보유권에 대한 역사적인 기즉권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이제는 천황제의 위세와 그에 따른 법률 및 행정기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세를 체계적으로 징수하는 힘에 의해 지탱되게끔 되었던 것이다.
긴 안목에서 본다면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이전의 유력한 우지들 중에서 특히 천황 조정에 가까운 호족에게는 오히려 유리한 것이었다. 이들은 곧 수도로 이주하여 새로운 귀족층을 형성했는데 대부분 천황으로부터 받은 職祿과 국내의 각지로부터 나라(柰良)에 들어오는 조세수입으로 이득을 얻도록 전략적으로 배치되었다. 나라시대의 최성기를 나타내주는 거대한 공공 조영물, 궁전, 관청, 사원, 도로 및 관개시설은 귀족을 위한 귀족의 권력집중을 웅변으로 말하여주고 있다. 일본은 정치제도와 문화양식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 5세기에 걸쳐 지속될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일본 역사의 긴 흐름 가운데 7세기는 귀족적 문화양식으로의 전환기라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왜냐하면 7세기 이전의 유력 우지들은 새로운 천황 조정을 중심으로 한 문민귀족으로 변모하여 이전의 지방적이고 호전적이었던 자질을 스스로 내버렸다. 유력 우지들은 자신들의 과거인 家系를 귀족의 시대로 함께 가지고 갔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독자적인 군사적, 경제적 힘의 원천으로부터는 멀어졌지만 새로운 중앙정부와 제휴함으로써, 또 고도로 세련된 생활양식에 접함으로써 새로운 특권과 안녕을 획득하였다. 이들이 상당히 능률적인 정치기구를 유지할 능력이 있는 한 전국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들의 권력이 정치적으로 시세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 것은 12세기 이후의 일이었고, 한편 그 사회적 신분은 실로 1945년까지 폐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8. 맺음말
야마토 朝廷의 형편이 이상에서 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은데 그것은 먼저 야마토(나라 분지)를 중심으로 한 정권에 의하여 우선 기내 <소천하>의 통일이 있었을 것이고 이로써 첫 단계가 다져진 다음에 그 동부 일본에로의 진출과 함께 서쪽 기비 지방과 큐슈 지방에로의 진출이라는 단계들이 있었을 것이다.5세기 말엽에 이르러 북 큐슈에 수립된 횡혈식 석실 구조가 기내 지방으로 전해 갔다는 것은 뒤에서 말하겠지만 이때 북 큐슈로부텨 강력한 힘의 작용, 그 곳으로부터의 정복자의 내습과 내주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저러한 둘째 단계가 아직도 5세기 말까지도 야마토 정권에 의해서 전개되지 못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6세기부터서나 야마토의 힘이 기비 지방과 큐슈에 미치게 되어 통일의 전제가 이룩되어 갔으리라고 한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 이는 또한 야마도 정권이 다른 지방 세력들에 대한 그 통제 기관으로서의 미야께라는 것을 큐슈 서부에 둔 것이 538년 이와이 반란 사건의 직후였다는 사실과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이 야마토 왕국 형편이라고 할 때에 사회 경제적 문제, 문화의 성격 문제 등 여러가지로 해명되어야 할 면들이 있겠으나 당면한 우리의 해명 대상은 이 왕국의 연합적 성격, 다시 말하면 호족들의 연합된 성격이다. 이 시기의 이 정권은 몇 개 대호족의 연합체이다. 이 당시 야마토 정권(나라 지방)은 <기미>요<오미>요<무라지>요 하는 고위 가바네 문벌들이 교체하여서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 신라의 이른바 3姓(朴,石,金) 교립, 고구려. 백제의 5부족 연립과 같은 테두리에서 초기에 야마토 정권이 그 주권자를 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호족들의 대립, 연립의 시기에 한 개<天皇>가계가 있어서 연면히 통치했다고 보는 것보다는 이렇게 보는 것이 훨씬 사리에 맞는 자연스러운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황실>이라는 것도 야마토 정권 초기에는 따로 없었던 것이다. 나라 분지를 중심으로 한 야마토 왜국은 몇 개의 대호족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정권이었고, 그 구성 부분으로 된 유력한 호족들에는 한국 계통도 있었다. 古墳 時代(야마토 시대)에 들어온 후에도 한국부터 문화'가 계속 전파되었음은 일본 학자들도 승인'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경우에 이를 수입'한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우리 이주민의 진출과 같은 사실에는 되도록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는 새로운 문화의 수입은 백제나 신라의 왕들이 있지도 않은 일본<천황>에게 바친 기술자들이나 귀화'를 위하여 도항한 사람들에 의하여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사실은 고분 시대에도 한국으로부터 우리 주민들은 일본 땅에 뿌리내린 한국 계통 나라들을 발판으로 해서 계통적이며 집단적으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저 땅의 원주민과 귀족들은 우리 3국의 귀족 문화를 배웠으며, 한국을 우러러 금, 은, 보화의 눈부신 나라로 보았다. 따라서 통일국가(やまと=大和=倭)도 통일적인 일본 문화가 아직 형성되기 이전인 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이주민들의 일본에로의 귀화'가 문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왜 땅 사람들의 한국화가 당면하는 역사적 현실이었다.
9. 참고자료
박 종수, 일본사 개설, 형설출판사,
와사다 대학 교수진, 일본의 역사.문화, 東洋文庫,
김 석형, 고대 한일 관계사, 한마당,
장용학, 허구의 나라 일본, 일월 서각
존 W.홀 作, 박영제 譯, 역민사
  • 가격1,5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8.10.14
  • 저작시기2008.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85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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